성 아래에서 왕이 죽고, 기와에는 다른 이름이 남았다

아차산성 · 해발 285m, 길이 1,125m, 2016년에 ‘북한산성’ 기와

2016년 발굴에서 ‘북한산성’이라고 새긴 기와가 나왔습니다. 조선 숙종 때 쌓은 북한산성과는 다른 글자입니다.
석축및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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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hasanRuins.jpg · 위키백과「아차산성」

이야기

광진구 광장동, 해발 285m. 성 길이는 1,125m이고 성벽 높이는 평균 10m입니다. 동·서·남쪽에 문이 있던 자리, 물을 빼던 길, 문 앞을 가리는 곡성, 건물터, 연못터, 온달샘이 성 안에 있습니다.

곡성은 성문 앞을 가리려고 성벽 일부를 밖으로 내어 쌓은 시설이죠. 문으로 들어오는 쪽을 옆에서 보게 만든 구조입니다. 성벽은 무너져 여러 시대 돌이 섞여 있고, 원래 건물은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름이 세 번 바뀝니다. 문헌의 아단성, 조선이 고친 아차성, 기와에 남은 북한산성.

286년의 중수, 475년의 죽음

삼국사기에는 백제 때인 286년에 이 성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처음 쌓은 해는 그 기록에 없습니다. 문헌의 아단성·아차성과 지금 발굴된 산성이 처음부터 같은 성인지도 아직 갈립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칩니다. 수도 한산이 함락되고, 백제 개로왕이 아단성 아래에서 죽습니다. 한강을 둔 방어선이 뚫린 해로 전해집니다.

그다음 이름은 온달이죠.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가, 죽령 이북의 땅을 찾으러 신라군과 싸우다 아단성 아래에서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평원왕이 그 출정을 허락했다고 하고, 부인 평강공주는 그 설화에 함께 나옵니다. 성 안에 온달샘이 있습니다.

왕과 장군의 죽음이 같은 성 아래로 전해진다는 것은, 이 산이 한강 유역이 오가던 자리였다는 말입니다. 쌓은 주체까지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7세기, 기와가 이름을 바꿨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잡은 뒤, 7세기 전후에 성벽을 다시 보축합니다. 그리고 이 성을 북한산성이라 부르며 북한산주의 치소로 씁니다. 치소는 그 고을의 관청이 있던 자리이죠.

2016년 9월 7일 발표된 발굴이 그 이름을 유물로 확인합니다. ‘북한산성’ 글씨가 새긴 기와가 여기서 처음 나왔습니다. 명문 기와는 표면에 글자가 있는 기와입니다. 조선 숙종 때 쌓은, 지금 북악 일대의 북한산성과는 다른 이름입니다. 신라가 한강을 가진 뒤 이 산성의 이름을 고쳐 부른 흔적입니다.

같은 발굴에서 신라 배수 시설이 나옵니다. 물이 나가는 구멍 3곳, 들어오는 구멍 2곳. 남쪽 성벽을 덧댄 보축, 망대 자리, 신라 연화문 와당 10여 점도 같이 나왔습니다. 고구려 연화문 와당은 홍련봉 1보루에서 나온 것과 같은 형태였습니다. 한 성 안에 고구려 기와 막새와 신라 글자 기와가 겹쳐 있는 셈입니다.

아차산성
아차산성
출처: 위키백과「아차산성」

조선 태조는 아단의 단(旦)을 차(且)로 고쳐 아차성이라 부르게 합니다. 장한성, 광장성이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문헌의 이름, 태조가 고친 이름, 신라 기와 위의 이름이 한 능선에 포개집니다.

1997년의 무기, 1999년의 온돌

1997년 보루 발굴에서는 토기 100여 점, 철기 30여 점, 철제 무기 100여 점이 나왔습니다. 토기는 주로 고구려 계통이었죠.

1998년과 1999년 1·2차 조사에서는 고구려 성벽, 건물터, 연못터, 집수장, 온돌 자리가 확인됩니다. 감시만 하던 빈 둔덕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머물고, 물을 모으고, 불을 때던 자리가 성 안에 있습니다.

286년의 ‘중수’는 처음 쌓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있던 성을 고쳤다는 기록입니다. 그 이전 창건 해는 비어 있고, 문헌의 아단성이 지금 걷는 성벽과 같은 선인지도 조사로 닫히지 않았습니다. 개로왕이 죽은 곳도 기록은 ‘아단성 아래’입니다. 추정은 이 산성으로 모이지만, 확정 문장은 아직 아닙니다.

온달의 출정은 6세기 후반으로 놓입니다. 475년의 함락과 같은 날의 일이 아닙니다. 한 번 잃은 한강 북쪽을, 사위가 다시 찾아 나섰다는 설화입니다. 평원왕이 허락하고, 싸움은 아단성 아래에서 화살로 끝납니다. 온달샘은 그 설화가 성 안에 남긴 이름입니다. 평강공주는 부인이고, 이 산의 발굴 층과는 별개의 인물로 설화에만 함께 나옵니다.

성벽 길이와 높이는 그 설화와 따로 잽니다. 1,125m에 평균 10m. 문 세 곳과 곡성이 있으면, 드나드는 방향을 정해 둔 성입니다. 물길은 성 안 물을 밖으로 빼던 자리입니다. 1998~1999년에 확인된 집수장은 그 물을 모으던 시설이고, 온돌 자리는 불을 때고 머물던 바닥입니다. 연못터는 건물터와 같이 성 안에 있습니다.

2016년의 숫자는 그 바닥 위에 신라 층을 얹습니다. 출수구 3, 입수구 2. 남벽을 덧댄 보축. 망대. 신라 연화문 와당 10여 점. 고구려 연화문 와당은 홍련봉 1보루 출토품과 형태가 같습니다. 한 성에서 고구려 막새와 신라 글자 기와가 같이 나온 해입니다.

조선에 들어와 태조가 글자를 고칩니다. 아단(阿旦)이 아차(阿且)가 됩니다. 장한성, 광장성이라는 다른 부름도 남습니다. 지금 지도의 ‘아차산’은 그 개명 이후의 이름입니다. 기와 위의 ‘북한산성’은 그보다 앞선, 신라가 치소로 쓰던 때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2016년의 ‘북한산성’ 기와는 갑자기 나타난 다른 산의 이름이 아닙니다. 백제 기록의 중수, 475년 개로왕, 온달의 죽음, 고구려 유물 위에, 신라가 이름을 고쳐 치소로 쓴 층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조선 숙종의 북한산성과 글자가 겹친 이유는, 신라가 먼저 이 성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입니다.

지금

길이 1,125m 성벽과 문 세 자리, 곡성, 출수구 3곳과 입수구 2곳, 망대, 건물터, 연못터, 온달샘이 해발 285m에 남아 있습니다. 조선의 북한산성과 다른 ‘북한산성’은, 이 성에서 나온 신라 기와 위의 글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아차산성은 누가 쌓았나요?
286년 백제 때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처음 쌓은 해는 없고, 문헌의 아단성·아차성과 현재 유적의 동일성은 아직 논란입니다.
개로왕과 온달은 이 성과 어떻게 연결되나요?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이 아단성 아래에서 죽었고, 온달이 신라군과 싸우다 아단성 아래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성 안에 온달샘이 있습니다.
‘북한산성’ 기와는 무엇인가요?
2016년 발굴에서 나온 신라 명문 기와입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뒤 이 성을 북한산성이라 부르고 북한산주 치소로 썼다는 근거로 봅니다. 1997년에는 토기 100여 점, 철기 30여 점, 철제 무기 100여 점이 나왔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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