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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핀 하나 뒤에 숨은 사람과 사건. 지금 그 자리를 지나는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 109편.
1분이면 보는 기억
쇼츠 전체 보기모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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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에서 물러난 야당 후보가 전주행 열차를 타기 전 머문 1년 9개월
1956년 5월 5일 아침, 전주행 열차에 오른 대통령 후보 신익희는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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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절터의 비문 한 줄이 찾아낸 홍제동 오층석탑의 1,000년 역사
기단도 없이 동네 자연석 위에 서 있던 돌탑 한 기가 1970년 시가지 확장 공사로 자리를 옮겨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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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을 위해 지은 1930년대 한옥, 문을 열자 긴 복도와 유리창이 나타났다
1930년대 한 아버지가 두 아들을 위해 지은 경운동 가옥은 전통 한옥의 외관 속에 실내 화장실, 목욕탕, 긴 복도, 유리창을 갖춘 근대 개량한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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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향불이 꺼진 동대문 밖 관우 사당
1908년 대한제국 정부가 향사이정령을 내리며, 1601년 완공 이래 300여 년간 이어지던 동관왕묘의 왕실 제사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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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에 새겨진 9명의 이름과 '필운대', 집은 사라져도 바위 표식은 남았다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곳이 조선 선조 대 명재상 이항복의 집터였음을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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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송준길·영의정 김수항의 글씨가 한 비석에 모인 이유
서울 강남구 자곡동 대모산 자락의 한 무덤 앞에 서면, 비석 하나에 새겨진 이름들에 눈이 머뭅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거두 송준길과 송시열이 각각 글을 짓고, 당대 명필 이정영이 글씨를 썼으며, 영의정 김수항이 머릿돌 전서를 새겼습니다. 당대 정계를 호령한 거물들의 손길이 왜 이 하나의 비석에 모두 모여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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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땅에 묻힌 94개 위패, 서울 문묘와 성균관 600년
태조 7년 한양 숭교방에 96칸 규모로 들어선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국왕조차 정문으로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조선 최고의 성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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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에서 서울 성북동까지… 전형필이 수습한 석탑의 비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문경에 서 있던 석탑 하나가 일본인에 의해 유출될 위기에 처하자, 간송 전형필이 이를 수습해 서울 성북동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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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 배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갈 뻔했던 고려 승탑
충북 괴산의 산기슭을 떠나 일본으로 끌려갈 뻔했던 승탑은 인천항 배에 오르기 바로 직전, 한 청년의 결단으로 서울 마당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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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요리집 명월관 자리가 66년 신문사 사옥이 된 이유
1926년 12월, 화동의 양철지붕 얹은 고가를 벗어난 동아일보사가 광화문 네거리 명월관 터에 전용 사옥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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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만에 주인 찾아간 왕릉 터, 헌릉 곁에 얽힌 비밀
태종 이방원이 잠든 헌릉 곁에는 세종대왕이 18년 동안 묻혀 있던 옛터와, 35년 동안 세종의 무덤으로 잘못 알려졌던 중종 비 장경왕후의 초장지가 함께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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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둘레 4.35미터, 청와대에 남은 230년 노거수 6그루
청와대 경내 물길 근처에는 나이가 100년에서 230년에 이르는 노거수 여섯 그루가 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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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유배에서 복직까지, 43세 왕손이 남긴 500년 비석
500년 전에 돌에 새긴 왕손의 신도비 글씨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마모되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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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우물 1.2m 아래에 감춰졌던 1,300년 전의 연못
조선시대 한양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산 정상에 다듬은 연못 아래에는, 까마득한 옛 시절의 석축이 고스란히 숨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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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마지막 밭갈이와 학교가 들어섰던 제기동의 제단, 서울 선농단
1910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밭을 갈던 행사를 끝으로, 왕실의 친경 의례는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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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숫자에 숨겨진 조선의 청계천 범람 경보 시스템
조선 성종 재위 기간, 썩기 쉬운 나무 기둥을 대신해 높이 3미터의 화강암 사각기둥 수표가 청계천 물길 속에 단단히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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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m 석축과 바위 글씨만 남은 1800년대 비밀 정원, 백석동천
1800년대 북악산 뒷자락 백사골에 들어선 별서 백석동천은 목조 건물은 모두 사라졌지만, 3.78m 높이의 석축과 바위에 새겨진 글씨만으로 19세기 도성 밖 별서의 구조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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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칸 청사가 불타고 옮겨지기까지, 삼군부 청헌당의 100년
1868년 경복궁 맞은편에 들어선 삼군부 청헌당은 조선 말 전국의 군권을 호령하던 최고 군사 기구의 청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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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장에 자리를 내주고 쫓겨났던 종친부 경근당의 32년 유랑기
1981년 8월, 조선 왕실의 어보와 어진을 모시던 종친부 중심 전각이 테니스장을 짓는다는 이유로 정독도서관 마당으로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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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의 왕을 섬긴 재상, 영의정을 사양하고 암사동에 잠들다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7명의 군주를 섬기며 정승의 자리에 오른 이극배는 영의정 임명을 사양한 뒤 연산군 1년(1495년) 이곳 암사동에 부인 경주 최씨와 함께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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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물 부족으로 좌천된 73세 노신, 임진왜란 피란길에서 반전을 쓰다
1581년 명나라에 바칠 공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좌천되었던 문신 류희림은 11년 뒤 73세의 나이로 임진왜란 피란길에 올라 반전의 생애를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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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의 주역과 청백리 손자가 함께 묻힌 풍산 심씨 묘역
기묘사화를 주도하며 정권을 잡았다가 신묘삼간으로 처형된 심정의 옆자리에는, 변방에서 전사한 아들과 청백리에 오른 손자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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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에 다시 선 서원, 헐린 해는 1870년이다
경주 현곡의 서원이 다시 선 해는 1924년입니다. 주춧돌만 남기고 헐린 해는 1870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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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 가장 가까웠던 맏형의 태가, 우면동 산꼭대기에 있다
1454년에 태어난 의경세자의 맏아들은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태는 서초구 우면동 태봉산 정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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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갑옷을 만들던 왕이, 폐위된 해에 강화도에서 죽다
도봉구 방학동의 묘는 왕릉이 아닙니다.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군부인 신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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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에 죽은 원손이, 1911년에 묻힌 할머니 옆에 있다
1921년 일본에서 태어나 1922년에 세상을 떠난 원손의 무덤이, 1911년에 안장된 할머니 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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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춧돌 둘만 남은 문, 이름은 1539년에 바뀌었다
지붕도 기둥도 없는 돌 두 개가 서 있습니다. 1896년에 헐린 영은문의 주춧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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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서가 폐성이라 적은 성에서, 권율이 머물렀다는 전승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때 이미 폐성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전승은 권율이 한강을 건너기 전 이 성에 머물렀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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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가 다섯이 글을 새긴 비석, 절은 중종 때 헐렸다
성종 2년(1471)에 세운 비석에는 문장가 다섯 이름이 있습니다. 그 절의 전각은 지금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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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년, 문정왕후가 중종만 선릉 옆으로 옮긴 까닭
강남의 한 능역에 능이 셋 있습니다. 선릉의 서쪽 언덕은 성종, 동쪽 언덕은 정현왕후입니다. 바로 곁의 정릉에는 중종만 있습니다. 두 번째 왕비 곁을 떠나 홀로 온 이유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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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명성황후가 숨은 내관의 성북동 정원
성북동 북쪽 비탈의 정원은 조선 고종 대 내관 황윤명이 가꾼 별서입니다. 1884년 그 정원이 왕후의 피난처가 된 이유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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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3.95미터, 조선 신하가 쓴 청 황제의 공덕비
한강가에 높이 3.95m, 폭 1.4m의 비가 서 있습니다.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입니다. 청나라 땅이 아닌 조선의 삼전도 나루터에, 조선의 신하가 이 글을 써야 했던 이유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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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 어깨 옆, 네모난 구멍만 남은 전각
북한산 삼천사지 길목, 높이 3미터가 넘는 병풍바위 한가운데에 얕은 홈을 파고 새긴 여래입상이 서 있습니다. 어깨 양쪽의 네모난 구멍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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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사이 흙둑이 하남위례성이 된 해, 2000년
송파구 풍납동, 아파트와 담장 사이에 흙으로 쌓은 성벽이 약 2.1km 남아 있습니다. 원래 둘레는 약 3.5km였습니다. 이 흙둑이 백제의 첫 도읍으로 굳어진 해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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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초등학교 운동장에 선 659년의 돌기둥 둘
세검정초등학교 운동장 옆에 돌기둥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입니다. 학교 교정에 이 기둥이 남은 이유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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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년 묘비 옆면, 한자 두 글자만 빼고 한글인 이유
노원구의 사각형 묘비 앞면과 뒷면은 한자로 가득합니다. 왼쪽 옆면만 점과 선의 한글입니다. 1536년에 그 글을 새긴 이유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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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를 걸어도 성벽이 끊기는 이유, 1907년부터 1925년
지금 종로·중구 일대를 걸어도 성벽이 눈에 띄지 않는 구간이 훨씬 많습니다. 이 도시는 한때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끊긴 이유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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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창고가 된 예배당, 54주년에 다시 문을 열다
용산 옛 방위사업청 부지 안, 빌딩 사이의 단층 붉은 전돌 건물은 1959년 12월 31일에 완공된 예배당입니다. 그 예배당이 수십 년 창고였던 이유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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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듬해, 창살 안의 사람이 바뀌다
1944년 이 형무소의 수용 인원은 2,890명이었습니다. 1946년, 갇히는 사람의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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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 신하의 자리에 들어간 51세 황제
기로소의 문턱은 정2품 이상, 나이 70세였습니다. 고종은 즉위 40년, 51세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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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을 헐고 세운 1898년의 석문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1898년 화강석 석문이 섰습니다. 본뜬 건물은 파리의 개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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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병원, 2년 뒤 총독부의원이 되다
1908년 함춘원 언덕에 완공된 대한의원은, 2년 뒤인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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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서 가장 붐빈 다리 밑의 정릉 돌
태종 10년, 1410년. 도성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건너던 광통교를 돌다리로 다시 쌓으며, 정릉의 병풍석이 다릿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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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고 들어온 문에 공신 이름을 걸다
1623년 밤, 능양군과 반정군은 창의문 문짝을 부수고 도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1742년, 영조는 그 공신들의 이름을 문루에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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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 집터 20여 기, 이름은 없다
방사성탄소측정은 이 한강변을 기원전 4,000년에서 3,000년기로 가리킵니다. 집터는 20여 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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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침대 밑에서 나간 독립선언서
1919년, 세브란스 병원 침상에 있던 3.1독립선언서는 갓난아이의 침대 밑을 거쳐 외신으로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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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여 기가 8기가 된 들판
1910년대 조사 보고서에는 석촌동 들판의 고분이 290여 기였습니다. 공원에 남은 수는 8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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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에 태어난 학자의 본가, 종로에는 표석만 있다
1786년에 태어나 1856년에 세상을 떠난 추사 김정희의 가문 터에, 지금은 서울시 역사문화 표석만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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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m 떨어진 산신령 부부, 굿판 대신 유교식 제사를 받는 이유
토속신을 모신 산신각이지만 무당의 굿판 대신 유교식 예법으로 통돼지를 바쳐온 공간이 평창동 기슭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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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꼭대기의 당집이 1925년경 인왕산으로 옮겨진 이유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은 왜 인왕산 기슭의 당집이 되었을까요. 이전을 요구받은 뒤 다시 세워진 시기는 1925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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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표의 여덟 글자, 성화 2년 2월 초하루의 예장
의령옹주 묘표에는 '성화 2년 2월 초1일 예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화 2년은 세조 12년, 1466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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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 6대손이 1733년에 지은 집, 현판은 두곡이다
1733년, 영조 9년에 회재 이언적의 6대손 이제중이 남촌에 집을 올렸습니다. 지금 대문에 남는 이름은 두곡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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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시굴이 연 곳, 기와와 숯이 한자리에서 나왔다
1994년 지표조사 이듬해, 시굴은 시골 가마터로만 전하던 야산에서 수십 기의 가마를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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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년에 시작한 절의 이름은 석굴암이 아니었습니다
신라 경덕왕 10년, 751년. 대상 김대성이 토함산 중턱에서 석굴 공사를 시작했을 때 이 절의 이름은 석불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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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집을 쏘라는 한 줄이 적혀 있었습니다
488년, 소지왕 10년. 남산 기슭 연못 가운데에서 나온 봉투 안에는 "궁으로 돌아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아라"라는 한 줄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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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9미터 바위 네 면에 부처와 보리수를 같이 새겼습니다
탑골의 사각형 바위는 높이가 9미터입니다. 한 면만 깎지 않고, 네 면에 불상과 보살, 승려, 비천, 보리수, 석탑을 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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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공의 기록은 855년, 기단의 탱주는 600년대 말
하층기단 면석에는 돌마다 탱주가 3개입니다. 사리공에서 나온 《무구정탑원기》는 그보다 훨씬 늦은 855년, 신라 문성왕 대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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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로 빈 돌방인데, 장례는 두 번이었습니다
봉분 지름 9.75미터, 높이 2미터. 도굴로 부장품은 거의 사라졌는데, 남은 토기 파편은 약 200년 간격의 장례 두 번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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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지신상은 있는데, 돌사자와 문무인석은 없습니다
둘레돌의 탱석에는 무기를 든 12지신상이 두 칸 건너 하나씩 새겨져 있습니다. 통일신라 왕릉에 흔히 서는 돌사자, 문인석, 무인석은 이 능 앞에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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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닿은 신라 무덤이 종이 위에서는 다섯 개였습니다
경주 평야 한복판의 고분들이 2011년 7월 28일 전까지는 사적 다섯 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왜 하나를 다섯으로 적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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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채에 큰 곳간을 붙인 집, 이름은 세 번 바뀌었습니다
경주 교동, 대문채 안에 작은 방과 큰 곳간이 나란히 있습니다. 집의 첫 칸에 곡식 창고를 둔 집은 누구의 종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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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9층, 서 있는 탑은 3층이다
선덕여왕 3년, 634년에 세운 탑입니다. 옛 기록은 9층이고, 지금 남아 있는 몸체는 3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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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년에 시작해 774년에 끝났고, 1593년에 목조가 탔다
재상 김대성이 751년에 공사를 시작해 774년에 마칩니다. 23년입니다. 지금 마당의 목조 전각은 그 사이 한 번 타고 다시 세워진 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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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와 53대 사이는 700년, 무덤은 나란히 세 기다
밑에서부터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무덤이라 전합니다. 8대와 53대 사이는 700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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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금비는 문헌에 많고, 실물은 이 한 기가 남았다
1614년에 세운 송금비는 원래 2기였습니다. 지금 확인되는 실물은 1기이고, 전국에서 남은 조선 시대 송금비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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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완성된 능을 파헤치고 석물만 남겼다
1452년에 신도비까지 세운 능을, 1469년에 파헤쳤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유해는 여주로 갔고, 내곡동에는 석물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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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통계국이 들어왔고, 2001년에 간판이 바뀌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 1959년에 설계가 시작돼 1961년에 준공된 청사가, 2001년부터 서울노인복지센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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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침돌 셋이 무너진 뒤, 2.9미터 덮개돌은 기울어진 채 남았다
덮개돌 길이는 2.9m입니다. 받침돌 네 개 가운데 세 개는 무너졌고, 돌판은 기울어진 채 경사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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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집에서 이름이 세 번 바뀐 궁
1593년, 선조가 한양에 돌아왔을 때 머물 궁이 없었습니다. 남은 집 가운데 하나를 임시 궁으로 썼습니다. 그 집이 누구의 집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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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년에 서고, 1616년에 다시 선 정전
성종이 1484년에 세운 명정전은 임진왜란 때 탔습니다. 지금 마당에 남은 건물은 1616년, 광해군 8년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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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궁으로 세워, 270년 법궁이 된 궁
1405년 창덕궁은 경복궁 다음의 이궁이었습니다. 1610년부터 1867년까지 270여 년, 왕들이 국정을 본 곳은 여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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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 12.5m, 임금 행렬에 맞춘 돌다리
금천교 상면은 길이 12.9미터, 너비 12.5미터입니다. 거의 정사각형입니다. 이 폭은 무엇에 맞춘 숫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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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25cm 돌이 정한 지하철의 깊이
보신각 울타리 안, 사방 25센티미터 화강암 한가운데에 직경 7센티미터 놋쇠 못이 박혀 있습니다. 수도권 전철의 높이는 여기서 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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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세손 원당에서 수안 땅을 뺀 기록
1755년 11월 20일, 예조가 영조에게 아뢰었습니다. 의소묘 원당인 봉원사에, 황해도 수안군의 땅을 또 주면 안 된다는 보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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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시설을 걷으니, 중랑천 서쪽에서 처음인 보루가 나왔다
2015년까지 배봉산 정상은 군사시설이라 일반인 출입이 막혀 있었습니다. 걷어 낸 뒤에서 고구려식 성벽 바닥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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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아닌 안국동에서 집무를 보던 대통령
윤보선은 제4대 대통령으로 있을 때도 청와대가 아니라 이 집에서 집무를 했습니다. 집은 1870년, 고종 7년에 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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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에 보루가 17개, 쓰인 시간은 80년
아차산·용마산·망우산·수락산·시루봉·홍련봉. 보루 17~18개 가운데 10여 개가 고구려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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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지 39년 뒤 세워진 우의정의 비
1743년, 묘 앞에 신도비가 섰습니다. 주인 김구가 세상을 떠난 1704년에서 39년 뒤입니다. 비는 무엇을 적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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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을 막는 성인데, 북쪽은 안 보인다
해발 420.3미터 성터에 서면 북쪽은 507미터 주봉에 막힙니다. 열린 쪽은 남쪽, 중랑구와 한강 쪽 들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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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의 왕비 능 석물이 청계천 광통교 다릿돌이 된 까닭
성북구 정릉의 석물 가운데 1396년 정동에서 옮겨 온 것은 장명등과 혼유석 아래 고석, 두 종류뿐입니다. 나머지는 1669년에 다시 새겼습니다. 옛 석물이 어디로 갔는지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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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묵서가 적은 절, 담장 안은 별원이다
1850년의 영건은 ‘종남산 미타사 약지’와 상량묵서에 적혀 있습니다. 담장은 극락전·독성전·노전을 한 울타리로 감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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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년, 정전에 방이 모자랐다
세종 3년(1421) 정종이 세상을 떠나자, 종묘 정전에는 그 신위를 둘 신실이 없었습니다. 옆에 세워진 건물이 영녕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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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칸짜리 전각의 현판은 독성전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입니다. 그런데 현판은 독성각이 아니라 독성전입니다. 건립은 융희 1년, 1907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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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쓰러져 있던 쌍탑, 1931년 가을에 다시 세워지다
1931년 가을, 경주고적보존회가 흙과 풀 사이에 흩어진 석재를 모아 높이 약 7m의 동·서 쌍탑을 다시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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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에 완공된 문에서, 1479년 공사는 1960년대에 나왔다
태조 7년(1398)에 완성된 한양의 정문인데, 성종 10년(1479)의 큰 공사는 1961~1963년 해체 수리 때야 확인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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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27단의 매끈한 곡선, 안은 사다리 두 개
높이는 약 9m입니다. 바깥 계단은 없고, 남동쪽 창으로 들어가 다시 사다리를 걸쳐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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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기계시험소 터에 탁지부가 본관을 세웠다
1906년에 공업전습소가 서고, 1908년에 본관이 올라갔습니다. 그 건물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정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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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래에서 왕이 죽고, 기와에는 다른 이름이 남았다
2016년 발굴에서 ‘북한산성’이라고 새긴 기와가 나왔습니다. 조선 숙종 때 쌓은 북한산성과는 다른 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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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아파트를 짓느라 통째로 퍼낸 섬, 50년 만에 다시 떠올랐다
지금 압구정 앞 한강을 보면 섬이 없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있었습니다. 그것도 꽤 큰 섬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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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가구가 살던 섬을 폭파하던 날, 주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잠깐, 여기 한번 봐 주세요. 지도 위 이 작은 섬은 반세기 전 정말로 폭탄에 날아갔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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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만들던 통일신라 쌍탑 규격을 깬 남산동의 비밀
통일신라 사람들은 탑을 세울 때 대칭과 규격을 엄격히 지켰지만, 경주 남산 자락의 이 오붓한 절터에서는 동과 서에 서로 전혀 다른 형태의 탑을 마주 세우는 파격을 선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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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때 잿더미가 된 정자를 1917년에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
넓은 안강평야를 굽어보는 양동마을 언덕 위, 잿더미 속에서 다시 되살아난 옛 정자의 이야기를 따라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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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개인 정원에 서 있던 1000년 고려 승탑, 왜 아직도 원주로 돌아가지 못했을까
저도 처음엔 강원도 원주 거돈사지에 서 있는 그 근사한 승탑이 당연히 1000년 전 진짜 유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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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년 만에 떠난 왕, 남겨진 왕비의 기원
깊은 골짜기 풀숲 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던 돌조각에는, 재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향한 신라 왕비의 절절한 기원이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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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법궁 한복판에 들어선 세종의 첨단 과학 연구소
저도 처음엔 경복궁을 그저 조선 왕실의 웅장한 법궁으로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궁궐 구석구석에 남겨진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이곳이 단순한 왕의 거처가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밝히던 최첨단 연구 기지였다는 사실에 담담한 놀라움을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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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에게 절하라던 이 언덕에, 지금은 그 일제에 맞선 문인이 서 있다
1912년, 흑석동 한강변 언덕에 일본 신사가 들어섰습니다. 지금 그 자리엔 다른 사람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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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최초의 골프장은, 왕실 묘역 자리에 있었다
지금의 효창공원 자리에, 한때 9홀짜리 골프장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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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에 상가를 얹었다, 그래서 지금도 차가 그 밑을 지난다
서울 낙원상가 1층 아래로는 지금도 차가 지나갑니다. 도로를 없애지 않고 그 위에 건물을 얹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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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 4개월 만에, 아파트가 그대로 무너졌다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40분, 완공된 지 4개월 된 5층 아파트가 그대로 무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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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 몽촌토성을 두고 아차산으로 옮겨갔나
지금은 등산객이 줄지어 오르는 아차산, 이 능선엔 한때 20여 개의 고구려 요새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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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려 지은 절, 지금은 호텔이 됐다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려고 세운 절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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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의 스타는 왜 죽었나 — 19년 뒤 뒤집힌 진술
1970년, 이 요정의 간판 호스티스가 교통사고로 위장된 총격으로 숨졌습니다. 범인으로 몰린 오빠는 19년 뒤 진술을 뒤집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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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만든 사교클럽, 그가 죽자 땅을 잃었다
1904년 고종 황제가 직접 헌장을 내려 만든 사교클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클럽, 지금 자리에 오기까지 세 번이나 쫓겨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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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 5층 창문은, 왜 이렇게 좁을까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 옆,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이 건물 5층 창문은 유난히 좁고 깁니다. 아이도 머리를 내밀지 못할 만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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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았던 목탑, 지금은 주춧돌만 남았다
경주 한복판 너른 절터에 서면, 주춧돌만 가지런히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곳엔 한때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았다고 전해지는 목탑이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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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4대조에서 시작해, 지금은 19실이 이어진 태묘
저도 처음엔 그저 길게 늘어선 서늘한 목조 건물이라고만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묵직한 지붕 아래 서서 가만히 숨을 죽여보면, 건국 초기의 조용한 떨림부터 수백 년 세월이 하나씩 겹쳐 쌓인 거대한 역사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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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참선의 방, 봉은사 선불당
저도 처음엔 강남 한복판의 빌딩 숲에 둘러싸인 이 고요한 목조 건물을 보며, 그저 평범하게 자리해 온 오래된 선방이겠거니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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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앞을 지나면서, 이 땅이 '대원각'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잠깐, 여기 한번 들어보세요. 지금은 종이 울리는 마당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는 밤마다 다른 소리가 났습니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아직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