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대통령이 청와대를 두고 왜 이 집에서 일을 봤을까요. 국가유산 기록은 이유까지는 적지 않습니다. 적힌 것은 순서입니다. 누가 샀고, 누가 살았고, 집무가 어디서 열렸는지.
1870년, 고종 7년에 상류 민가가 지어집니다. 백과에는 민영익의 아들 민규식이 지은 집으로 나와 있고, 고종이 이 집을 사 박영효에게 내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대목은 1870년 건립 기록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자료가 얇습니다. 국가유산 쪽이 분명히 적는 매입은 그다음입니다.
1910년경, 윤치소가 사들이다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가 1910년경 이 집을 삽니다. 백과에는 주변 땅을 더 사 99칸으로 넓혔고, 대지가 약 1,400평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99칸이 어느 해에 갖춰졌는지는 비어 있습니다.
윤보선은 7~8세부터 이 집에서 자랍니다. 그 사이 다른 사람이 한 번 스칩니다. 1910년 이후 박영효가 일본에서 돌아와, 잠시 이 집에 머물렀습니다. 갑신정변 뒤 일본에 있다가 돌아온 사람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아이의 집에 잠시 있었던 셈입니다.
현판 두 개, 양식 두 겹
바깥사랑채 현판 남청헌은 순조가 쓴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옥균이 쓴 진충보국도 걸려 있습니다.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한다는 뜻이죠. 순조의 글씨와 김옥균의 글씨가, 뒤에 대통령 집무가 열리던 집 안에 같이 있습니다.
넓은 대지 안에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안채, 대문과 행랑채, 창고가 있습니다. 겉은 한옥입니다. 세부는 청나라 말기 수법입니다. 윤보선이 상해 임시정부 시절 중국에서 본 것이 집에 들어왔다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가구도 그 결을 따릅니다. 서양식 가구에 전통 기법을 섞었습니다. 한옥 틀을 두고 안쪽만 바꾼 집입니다.
집무가 열린 곳
집의 칸은 바깥과 안이 나뉩니다. 바깥사랑채는 손님이 앉던 채이고, 안사랑채와 안채는 그 안쪽입니다. 대문에서 행랑채로 이어지고, 창고가 따로 있습니다. 상류 민가로서 한 집 안에 그 기능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누가 처음 지었는지를 국가유산 기록은 비워 둡니다. 연도만 1870년입니다.
백과의 주인은 그 빈칸을 다르게 채웁니다. 민영익의 아들 민규식이 지었고, 고종이 사서 박영효에게 내렸다는 줄입니다. 1870년 건립과 그 하사가 한 해의 일인지, 자료는 잇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글은 국가유산 쪽의 매입 연도를 축으로 두고, 백과의 주인은 백과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만 둡니다.
윤치소의 매입은 1910년경입니다. 그해 전후는 국권이 넘어가던 때이기도 합니다. 집은 그 해에 윤씨 집안의 사가가 됩니다. 아이는 이미 7~8세였거나, 그 무렵부터 이 마당에서 자랍니다. 대통령이 된 뒤의 집무실이, 어린 시절의 집과 같은 주소입니다.
박영효의 체류는 집무보다 앞섭니다. 1910년 이후, 일본에서 돌아와 잠시 머뭅니다. 고종이 내렸다는 백과의 문장과, 귀국 후 잠시 머물렀다는 국가유산 문장이 한 사람을 이 집에 겹쳐 둡니다. 오래 산 사람은 윤보선 쪽입니다.
남청헌은 바깥사랑채에 있습니다. 순조가 쓴 것으로 전해집니다. 진충보국은 김옥균의 글씨입니다. 왕실의 글씨와 개화파의 글씨가 같은 집에 걸린 채, 1960년대의 집무를 맞습니다. 다른 채에도 어필과 유명인이 쓴 현판이 더 있습니다.
청말 수법은 처마와 세부입니다. 한옥의 겉틀을 바꾸지 않고, 꾸미는 손을 청나라 말기 쪽으로 옮긴 것입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의 중국 경험이 그 설명으로 붙어 있습니다. 가구는 중국과 영국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서양 가구에 전통 기법을 섞었다고 합니다. 집무가 열린 방의 생김새가, 조선 한옥과 그 경험이 한 칸에 있는 이유입니다.
1960년대,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집무는 청와대가 아닌 이 집에서 열립니다. 7~8세부터 살던 집이고, 아버지가 1910년경 산 집입니다. 기록은 그 사실까지입니다. 청와대를 마다한 속마음까지는 적지 않습니다.
지정은 훨씬 뒤입니다. 1978년 서울특별시 민속자료가 되었다가, 2002년 사적 제438호로 올라갑니다. 민속자료에서 사적으로 오른 것은, 살림집을 국가가 보존 목록에 다시 올린 절차입니다. 집무가 끝난 뒤에도 현판과 채의 배치는 그 주소에 남아 있습니다. 바깥사랑채의 남청헌, 김옥균의 진충보국, 청말 세부, 서양 가구와 전통 기법이 섞인 실내. 1870년의 집과 1960년대의 집무가 같은 칸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질문의 답은 이유의 문장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집무가 열린 곳은, 1870년에 지어 1910년경 윤치소가 사고, 순조와 김옥균의 글씨가 걸린 안국동의 이 집이었습니다.
지금
안국동에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가 남아 있습니다. 남청헌과 진충보국이 걸려 있고, 청말 수법과 서양식 가구가 한옥 안에 같이 있습니다. 2002년 사적 제438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