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조선 선조 대, 대제학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힌 이항복은 한양 인왕산 자락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호인 '필운(弼雲)'을 따서 이곳을 필운대라 불렀습니다.
이항복이 살던 집은 세월이 흐르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목조 가옥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있던 높다란 암벽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암벽이 이 자리의 기억을 다시 불러온 것은 조선 후기였습니다.
암벽 오른쪽에는 9명의 이름이 세로로 깎아 새겨졌습니다. 각자(刻字)는 바위에 글씨나 명단을 깎아 새겨 넣는 일을 뜻합니다. 이 9명의 이름은 순조 13년인 1813년 또는 고종 10년인 1873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이항복의 집을 지을 때 참여했던 인물들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종 10년,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이 조상의 옛 집터를 찾아왔습니다.
이유원은 조상의 거처에 서서 느낀 회포를 시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암벽 가운데에 그 시구를 새겼습니다. 암벽 왼쪽에 세로로 크게 새겨진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 역시 이유원이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조상이 머물던 터에 후손이 찾아와 바위에 글씨를 새기면서, 사라질 뻔했던 거처의 기억은 기록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집 한 채 남아 있지 않지만 이곳이 이항복의 집터였음을 알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암벽 때문입니다. 후손 이유원이 바위에 새긴 글씨와 집을 지은 사람들의 명단이 조선 시대 거처의 위치를 지금까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항복의 호에서 시작된 '필운'이라는 이름은 훗날 이 일대의 행정구역 이름인 서울 종로구 '필운동'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이 자리는 서울 종로구 배화여고 뒤뜰에 위치해 있습니다.
목조 가옥 건물은 모두 사라졌지만, 높다란 암벽에는 '필운대'라는 커다란 글씨와 이유원의 시구, 그리고 9명의 명단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암벽 각자는 이항복의 옛 자취와 이유원의 서체를 연구하는 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