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지 39년 뒤 세워진 우의정의 비

충헌공 김구 묘역 · 1704년의 죽음, 1743년의 신도비

1743년, 묘 앞에 신도비가 섰습니다. 주인 김구가 세상을 떠난 1704년에서 39년 뒤입니다. 비는 무엇을 적었을까요.
충헌김공신도비
충헌김공신도비
출처: 국가유산청

이야기

1743년의 비

김구는 1649년에 태어나 1704년에 죽었습니다. 숙종 대의 신하이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을 거쳐 우의정까지 올랐으며, 죽은 뒤 시호는 충헌입니다. 묘 앞 신도비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한참 지나 영조 19년인 1743년에 세워졌습니다. 1704년에서 39년 뒤입니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을 지낸 인물의 평생 업적과 삶을 돌에 새겨, 그 묘 앞에 세우는 비석입니다. 비문은 영조 대의 영의정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이 썼습니다. 두 사람의 글이 김구의 생애를 비에 남겼습니다.

형태를 보면 아랫부분과 지붕이 다릅니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었습니다. 단정하게 깎인 비몸에 비해, 지붕돌에는 조각이 많습니다. 용과 봉황, 불로초와 구름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200여 년이 지난 뒤에도 그 무늬가 지붕돌에 남아 있습니다.

1682년, 언관의 상소

시계를 숙종 8년, 1682년으로 돌리면 김구가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간 해입니다.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었습니다. 언관 직책입니다. 그때 조정은 노론과 소론이 맞서, 정파의 비방이 격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당파의 이익을 따르기보다, 김구는 당대의 시국에 대해 상소를 올렸습니다. 어수선한 정국을 바로잡고,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쟁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려고 했습니다.

숙종은 그 상소와 처신을 신뢰했습니다. 국왕의 위세에 굽히지 않고, 조선의 기틀에 따라 처신했다는 점이 뒤에 우의정과 시호로 이어집니다. 벼슬의 이름은 대사간, 판결사, 형조판서, 우의정 순으로 기록에 남습니다.

노산군을 단종으로

공적 가운데 기록에 가장 또렷한 일은, 대사간을 거쳐 판결사로 있을 때입니다.

조정에서는 오래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끝내 목숨을 잃은 노산군을, 어떻게 대할지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임금이었고, 왕위에서 쫓겨난 채로 200여 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 억울함을 공식적으로 풀고 임금의 신위를 되돌리는 일은, 사림의 명분과 왕실의 금기에 닿는 사안이었습니다.

김구는 그 논의 앞에서 노산군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숙종에게 올렸습니다. 노산군은 묘호 '단종'을 되찾고, 조선 왕실의 국왕으로 복위됐습니다.

단종이 복위되자, 단종의 비였던 송씨도 무덤이 능으로 추봉되어야 했습니다. 정순왕후입니다. 판결사 김구는 단종비 송씨의 묘를 사릉이라는 능으로 올리고, 새로 조성하는 공사의 당상, 곧 총책임자로 나섰습니다. 능의 자리를 잡고, 돌을 깎아 석물을 세우며, 왕비의 능을 갖추는 과정을 그가 진두지휘했습니다.

그 뒤 형조판서를 거쳐 숙종 29년(1703)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이듬해인 170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금과 조정은 그 일생에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올렸고, 신도비는 39년 뒤인 영조 19년(1743)에 섰습니다. 비문은 이의현, 글씨는 서명균입니다.

지금

충헌공 김구 묘역
충헌공 김구 묘역
출처: 위키백과

묘역에 신도비가 남아 있습니다. 네모난 받침돌, 비몸, 화려한 조각의 지붕돌입니다. 지붕돌의 용과 봉황, 불로초와 구름 무늬도 묘역 안에 남아 있습니다.

비는 죽은 바로 그해에 서지 않았습니다. 김구는 1704년에 죽었고, 비는 1743년에 섰습니다. 39년입니다. 비에 담긴 삶의 핵심은 상소 두 갈래입니다. 1682년 문과 급제 뒤 사헌부·사간원에서, 노론과 소론의 당쟁을 누그러뜨리려 올린 상소. 그리고 판결사 때 노산군을 단종으로 되돌리고, 단종비 송씨(정순왕후)의 묘를 사릉으로 올리는 공사를 당상으로 맡은 일입니다. 1703년 우의정, 시호 충헌. 비문은 영의정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이 썼습니다. 1743년의 비가 묻는 답은 그 경력입니다.

1649년에 태어나 1704년에 죽은 김구는, 숙종 8년(1682) 문과로 언관이 됐습니다. 대사간과 판결사를 지나는 동안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노산군의 복위를 상소했고, 200여 년 만에 묘호 단종이 돌아왔습니다. 단종비 송씨의 무덤을 사릉으로 추봉하는 석물 공사의 총책임도 판결사 김구였습니다. 형조판서를 거쳐 숙종 29년(1703) 우의정이 됐고, 시호 충헌이 올려졌습니다. 신도비는 영조 19년(1743)에야 섰습니다. 네모 받침 위 비몸, 지붕돌의 용·봉황·불로초·구름. 그 비가 묘역에 남아 있습니다. 비문은 영의정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이 썼습니다. 노론과 소론이 맞서던 조정에서 그가 올린 것은 당파의 비방이 아니라, 시국을 바로잡자는 상소였습니다. 시호 충헌은 그 일생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김구는 어떤 일을 했나요?
1649~1704년 인물로, 숙종 8년(1682)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사간원에서 노론과 소론의 당쟁을 완화하려 상소했습니다. 판결사 때 노산군의 복위를 주장해 단종이 되게 했고, 단종비 송씨의 묘를 사릉으로 추봉하는 공사를 맡았습니다. 1703년 우의정, 시호는 충헌입니다.
신도비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요?
영조 19년(1743)에 세워졌습니다. 비문은 영의정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이 썼습니다.
비의 생김은 어떤가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렸습니다. 지붕돌에는 용, 봉황, 불로초, 구름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문화재공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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