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혜화동 대학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정 안입니다. 이 목조 건물은 처음부터 대학 본관이 아니었습니다. 자리는 전환국 시대의 기계시험소 터입니다. 화폐를 만들고, 관련 기계의 성능을 검사하던 자리였습니다.
1906년, 대한제국 시기에 공업전습소가 발족합니다. 근대 공업 기술과 실업 교육을 맡는 기관입니다. 교육과 행정을 둘 중심 건물이 필요해졌습니다. 1908년, 순종 재위 융희 2년에 본관이 들어섭니다.
설계는 대한제국 탁지부 건축소가 맡았습니다. 시공은 일본인 요시다 겐조(길전겸조)가 담당했습니다. 국가 기관이 도면을 그리고 시공자가 형태를 올린 해입니다. 기계시험소 터가 공업 교육 본관 자리로 바뀐 것이죠.
융희 2년은 순종이 즉위한 뒤 국운이 기울던 시기입니다. 그 해에 탁지부 건축소와 요시다 겐조의 손으로 이 목조 본관이 섰습니다. 기계를 시험하던 터 위에, 공업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모이는 건물이 생긴 것입니다.
공업전습소의 역할이 끝난 뒤에도 쓰임은 산업과 교육 쪽에 남았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으로 쓰였습니다. 국가 산업 기술의 시험과 연구를 맡은 자리입니다. 기계시험소, 공업전습소, 국립공업시험원이 한 터에서 이어집니다.
그다음 사용자는 한국방송통신대학입니다. 대학이 건물을 인수했습니다. 만학도와 학생이 드나드는 교정 안에, 1908년의 목조 본관이 남아 있습니다.
연도만 놓으면 이렇습니다. 전환국 기계시험소 터. 1906년 공업전습소 발족. 1908년 융희 2년, 탁지부 건축소 설계, 요시다 겐조 시공. 광복 뒤 국립공업시험원 본관. 다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 교정에 이 건물이 있는 이유는, 시험소 터에 세운 교육 본관이 시험원을 거쳐 대학에 인수됐기 때문입니다.
자리를 한 겹씩 보면 쓰임이 네 번 바뀝니다. 처음은 전환국 기계시험소입니다. 근대 화폐를 만들고 기계 성능을 검사하던 터입니다. 1906년 공업전습소가 발족하면서 교육 기관의 땅이 됩니다. 근대 공업 기술과 실업 교육을 맡은 곳이죠. 본관 건물이 필요해진 것은 그 다음입니다. 1908년, 순종 융희 2년에 목조 본관이 섭니다.
도면은 대한제국 탁지부 건축소가 그렸습니다. 나라의 재정과 건축을 맡은 관청입니다. 시공 이름은 일본인 요시다 겐조, 한자로는 길전겸조입니다. 황제의 연호 아래 국가 기관이 설계하고, 시공자가 형태를 만든 해입니다. 순종이 즉위한 뒤 국운이 기울던 시기와, 공업 기술을 가르치려던 건물이 같은 해에 겹칩니다.
공업전습소 이후에도 산업과 교육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광복 뒤 대한민국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이 됩니다. 국가 산업 기술을 시험하고 연구하던 중심 건물이었죠. 그 뒤를 한국방송통신대학이 인수합니다. 만학도와 학생이 드나드는 교정 안에 1908년 목조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혜화동 대학로, 종로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입니다. 1906년 발족, 1908년 융희 2년 준공, 설계 탁지부 건축소, 시공 요시다 겐조—그 네 가지가 대학 교정 안 목조 본관의 출발점입니다.
지금
구 공업전습소 본관은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안에 있습니다. 1908년에 탁지부 건축소가 설계하고 요시다 겐조가 시공한 목조 건물입니다. 전환국 기계시험소가 있던 터이고, 1906년 공업전습소 발족 뒤에 본관이 됐습니다. 뒤에는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으로 쓰였습니다.
대학로 한복판의 이 건물이 왜 교정 안에 있는지는, 1908년의 설계 주체로 돌아갑니다. 대한제국 탁지부가 시험소 터에 세운 공업 교육 본관이, 시험원을 거쳐 방송통신대 건물이 됐기 때문입니다. 순종 융희 2년의 목조 본관이 종로구 대학로 교정에 남은 이유입니다. 전환국 기계시험소에서 공업전습소로, 국립공업시험원에서 한국방송통신대학으로, 같은 터가 시험과 교육을 번갈아 맡았습니다. 시공자 이름은 요시다 겐조, 길전겸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