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1446년, 세종 28년입니다.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납니다. 세종은 안장 자리를 아버지 태종의 헌릉 서쪽 산등성이로 잡습니다. 지금 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13번지 일대입니다. 구 영릉(舊 英陵)의 시작입니다.
이 능은 『국조오례의』 치장제도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능으로 정리됩니다. 조선 초기 왕릉을 대표하는 능이기도 합니다. 구조는 동분이실(同墳異室)입니다. 봉분 하나에 석실 둘입니다. 나중에 자신도 왕비 곁에 눕겠다는 세종의 뜻이 반영된 설계로 전해집니다.
소헌왕후가 먼저 묻힌 뒤 4년, 1450년 세종 32년에 세종이 세상을 떠납니다. 구 영릉 서실에 합장됩니다. 1452년 문종 2년, 문종이 세종대왕신도비를 세웁니다.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비입니다. 이 해에 구 영릉의 공역이 마무리됩니다.
석물 배치는 영릉의 예를 따릅니다. 문관석인상 2기, 무관석인상 2기입니다. 석양, 석마, 석호가 각각 4기입니다. 석실 안에는 고구려 계통 고분 벽화의 전통을 잇는 사신도와 일월성신도가 그려졌습니다. 봉분 둘레는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입니다. 바깥에는 외박석과 난간주석을 둘렀습니다.
1469년, 예종 1년입니다. 완성에서 20년도 채 되지 않아 논쟁이 붙습니다. 터가 풍수지리상 길지가 못 되어 국가와 왕실에 액운을 가져온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예종은 구 영릉을 파헤치고, 세종과 소헌왕후의 유해를 경기도 여주 영릉으로 옮깁니다. 천장(遷葬)입니다. 지하 석실과 석물은 여주까지 다 옮기지 못했습니다. 내곡동 자리에 남거나, 흙 속에 묻혔습니다.
세조는 자기 능인 광릉에서 제도를 바꿉니다. 석실을 없애고 회격묘를 쓰게 합니다. 임금의 공덕은 승정원일기와 사관의 기록에 남으면 충분하다며,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게 합니다. 광릉 이후 조선 왕릉에서 신도비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구 영릉의 세종대왕신도비는 세조 이전 방식을 남긴, 조선 왕릉의 마지막 신도비로 꼽힙니다. 유해는 여주에 있습니다. 내곡동에 남은 것은 문종 2년에 세운 비와, 병풍석·석인상·석수입니다.
연도를 다시 놓으면 공사는 4년 단위로 이어집니다. 1446년 세종 28년, 소헌왕후 심씨가 죽고 헌릉 서쪽 내곡동 산13번지에 능이 시작됩니다. 1450년 세종 32년, 세종이 서실에 합장됩니다. 먼저 묻힌 왕비와 나중 왕을 한 봉분에 두되 석실을 나눈 것이 동분이실입니다. 1452년 문종 2년, 아들이 아버지의 업적을 적어 신도비를 세우고 공역이 끝납니다.
석물의 수는 영릉의 예를 따릅니다. 문관석인상 2, 무관석인상 2입니다. 능을 지키는 석양 4, 석마 4, 석호 4입니다. 석실 벽에는 사신도와 일월성신도가 있습니다. 고구려 계통 고분 벽화의 전통을 이은 그림으로 정리됩니다. 봉분 둘레의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바깥은 외박석과 난간주석입니다. 『국조오례의』 치장제도로 조성된 마지막 능이라는 위치가 여기 붙습니다.
1469년 예종 1년, 풍수 논란이 터집니다. 터가 길지가 못 되어 나라와 왕실에 액운을 가져온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예종은 능을 파고 유해를 경기도 여주 영릉으로 옮깁니다. 지하 석실과 큰 석물은 여주까지 전부 가지 못했습니다. 내곡동에 남거나 흙에 묻혔습니다. 완성에서 20년이 안 된 천장입니다.
세조의 광릉은 다른 제도입니다. 석실을 없애고 회격묘를 씁니다. 공덕은 승정원일기와 사관 기록이면 충분하다며 신도비를 세우지 않습니다. 광릉 뒤로 조선 왕릉 신도비는 끊깁니다. 구 영릉의 비는 그 단절 앞에 서 있는 마지막 사례입니다. 이수와 귀부가 내곡동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
내곡동 구 영릉 터의 석물은 발굴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유해는 1469년 여주 영릉으로 옮겨 갔습니다. 무관석과 문관석, 신도비의 이수와 귀부는 이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유해 없는 자리에 돌이 남은 이유는 풍수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예종이 길지가 못 된다고 보고 천장하면서, 석실과 석물을 여주까지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도비가 여기 있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세조가 광릉 이후 신도비를 없애기 전에, 문종이 1452년에 이미 세워 두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