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경주 시가지의 대릉원과 인왕동 일대 분묘군에서 서남쪽으로 떨어진 구릉에, 신라 제35대 경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능이 있습니다. 경주 경덕왕릉입니다.
경덕왕의 본명은 헌영으로, 성덕왕의 아들입니다. 742년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삼국 통일 이후 단단해 보이던 전제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왕실의 권위는 귀족 세력의 반발과 맞물려 금이 가고 있었습니다. 헌영은 그 시기에 나라의 기틀을 다시 잡아야 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왕권 강화와 행정 정비에 나섰습니다.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정비했습니다. 관료 직제를 개편했습니다. 중앙집권 체제를 다시 세우려 한 집권기입니다. 재위는 765년까지, 23년 남짓이고, 통일신라의 번성과 내부의 균열이 같이 있던 시기입니다.
이 능의 봉분은 둥급니다. 봉분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바닥에 둘레돌을 둘렀습니다. 구조는 목조 건축의 돌기단과 닮았습니다. 바닥에 지지대 구실의 돌을 깔고, 그 위에 네모난 면석을 가로로 두릅니다. 면석과 면석 사이에는 기둥 구실의 탱석을 끼웁니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인 복장에 무기를 쥔 12지신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면석과 탱석 위에는 덮개돌을 얹었습니다.
둘레돌 바깥에는 돌기둥 난간이 있습니다. 돌기둥은 40개입니다. 능 전체 바깥을 두릅니다. 능 앞에는 안상문을 새긴 높은 석상이 있습니다.

통일신라 왕릉의 앞에는 문인석, 무인석, 돌사자가 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능에는 그 석물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둘레돌과 40개 난간은 있는데, 왕릉을 갖추는 그 석조물은 빠져 있습니다.
기록도 어긋납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적힌 경덕왕릉의 위치는, 경주 서남쪽 이 구릉의 지형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사서가 가리키는 자리와 지금 능이 있는 자리가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둘레돌을 다듬은 수법과 12지신상 조각은, 경덕왕 재위인 8세기 중엽보다 뒤인 신라 후기 수법에 가깝다는 연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행정구역과 직제를 고친 왕 헌영. 이 능의 피장자가 그 왕인지는, 석물의 빈자리와 사서의 위치, 조각 수법이 동시에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헌영의 자리를 연도로 다시 적으면 이렇습니다. 성덕왕의 아들입니다. 742년에 즉위해 765년까지 23년 남짓을 다스렸습니다. 삼국 통일 뒤 전제왕권이 흔들리던 시기입니다. 귀족의 반발이 왕실의 권위와 겹쳐 있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전국 행정구역의 명칭 정비와 관료 직제 개편입니다. 중앙의 통치를 다시 세우려 한 집권으로 기록됩니다.
능의 돌은 아래에서 위로 이렇게 쌓입니다. 봉분은 둥급니다. 바닥에 지지대 구실의 돌을 깝니다. 그 위에 네모난 면석을 가로로 두릅니다. 면석 사이에는 탱석을 기둥처럼 끼웁니다. 목조 건물의 돌기단과 같은 구성입니다. 탱석의 12지신상은 매 칸이 아닙니다. 두 칸을 건너 하나씩입니다. 복장은 무인이고, 손에는 무기가 있습니다. 면석과 탱석 위에는 덮개돌이 있습니다.
둘레돌에서 한 걸음 밖은 난간입니다. 돌기둥이 40개입니다. 능 앞에는 안상문을 새긴 높은 석상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남아 있습니다. 없는 쪽이 질문입니다. 통일신라 왕릉 앞에 자주 서는 문인석, 무인석, 돌사자가 이 능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위치도 질문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적는 경덕왕릉의 자리는 경주 서남쪽 이 구릉과 맞지 않습니다. 조각 수법은 재위 시기인 8세기 중엽보다 늦은 신라 후기에 가깝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세 가지가 같이 열려 있습니다. 석물이 빠짐, 사서의 위치가 다름, 조각이 더 늦음. 그래서 이 능은 경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지만, 그 왕의 능이라고 확정되지는 않습니다.
지금
능은 경주 시가지 서남쪽 구릉에서 사적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돌사자, 문인석, 무인석은 보이지 않습니다. 둘레돌, 무기를 든 12지신상, 돌기둥 40개의 난간, 안상문 석상은 남아 있습니다.
12지신상까지 둘렀는데 문무인석과 돌사자가 없는 이유에 대한 확정 답은 없습니다. 사서의 위치와 이 자리가 다르고, 조각은 8세기 중엽보다 늦은 신라 후기로 본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경덕왕의 능으로 전해지지만, 그 왕릉이 맞는지는 아직 의문입니다. 헌영은 742년부터 765년까지 행정구역과 직제를 고친 왕이고, 이 구릉의 돌은 그 재위보다 늦은 수법이라는 연구와, 사서와 다른 위치, 없는 문무인석을 같이 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