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로 빈 돌방인데, 장례는 두 번이었습니다

경주 황성동 고분 · 7세기 중반의 첫 매장과 9세기의 추장

봉분 지름 9.75미터, 높이 2미터. 도굴로 부장품은 거의 사라졌는데, 남은 토기 파편은 약 200년 간격의 장례 두 번을 가리킵니다.
석실분 전경
석실분 전경
출처: 본 저작물은 '국가유산청'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석실분 전경'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유산청, www.kh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

경주의 큰 봉분은 대릉원처럼 우뚝한 언덕으로 기억되기 쉽습니다. 황성동 고분은 산기슭이 아니라 평지입니다. 인근 용강동 고분과 함께, 경주 평지의 대표적인 신라 굴식돌방무덤입니다.

처음 돌을 놓은 시기는 7세기 중반입니다. 삼국의 긴장이 높던 때, 황성동의 평평한 땅에 기반을 다졌습니다. 흙만 쌓지 않았습니다. 모래흙과 자갈, 점성이 강한 질흙을 켜켜이 다져 봉분을 올렸습니다. 가장자리에는 호석을 둘렀습니다.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막는 돌입니다.

돌방은 남북으로 긴 네모입니다. 남북 2.4미터, 동서 1.75미터입니다. 벽은 위로 가며 네 모서리 돌을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모줄임입니다. 천장 면적을 줄여 쌓는 방식입니다. 안으로 드는 널길은 남쪽 벽 왼편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신라 초기의 돌무지덧널무덤은 시신과 부장품을 넣은 뒤 돌과 흙으로 덮습니다. 한 번 봉인하면 다시 열 수 없습니다. 굴식돌방무덤은 널길이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돌방 안으로 다시 들어갈 여지가 있습니다. 이 고분에서 나중에 확인된 일의 조건이 그 구조입니다.

발굴이 시작됐을 때 무덤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습니다. 봉분과 석실 일부가 무너져 있었습니다. 부장 유물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남은 토기 파편의 양식과 내부 구조를 보니, 매장은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7세기 중반에 만들어져 첫 매장이 있었습니다. 약 200년 뒤, 9세기쯤 시신을 다시 안치했습니다. 이미 있는 무덤의 통로를 열고 나중에 시신을 더 넣는 일을 추장이라고 합니다.

200년은 7세기 중반의 무덤이 9세기까지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신라가 삼국 통일의 소용돌이에 있던 시기의 무덤이, 신라 하대로 넘어가서도 다시 열렸습니다.

도굴로 유물이 대부분 없어져, 첫 매장자와 두 번째 매장자가 혈연인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름도, 신분도 알 수 없습니다. 확인된 것은 같은 석실의 널길이 두 번째 장례에 다시 쓰였다는 점입니다.

숫자를 다시 놓으면 봉분과 돌방이 구분됩니다. 겉의 봉분은 지름 9.75미터, 높이 2.0미터입니다. 재료는 모래흙, 자갈, 점성이 강한 질흙입니다. 한 번에 쌓지 않고 켜켜이 다졌습니다. 가장자리 호석은 그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두른 돌입니다. 속의 돌방은 남북 2.4미터, 동서 1.75미터입니다. 긴 네모입니다. 천장은 모줄임입니다. 벽을 올리며 네 모서리의 돌을 안으로 밀어, 위를 좁혔습니다. 드나드는 널길은 남쪽 벽의 왼편입니다.

이 널길이 200년의 조건입니다. 신라 초기의 돌무지덧널무덤은 시신과 부장품을 넣은 뒤 돌과 흙으로 덮어 다시 열지 않습니다. 굴식돌방무덤은 통로가 남습니다. 나중에 같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황성동 고분은 그 형식입니다. 용강동 고분과 함께 경주 평지의 대표 사례로 꼽힙니다. 산기슭의 무덤도, 대릉원처럼 우뚝한 봉분군도 아닙니다. 시가지 평지에 있습니다.

발굴 때 보인 상태는 도굴 이후입니다. 봉분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석실 일부도 무너졌습니다. 부장 유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빈방에서 남은 것은 토기 파편과 구조입니다. 파편의 양식과 내부 구조를 맞춰 보니 매장 시점이 둘입니다. 7세기 중반의 첫 매장, 약 200년 뒤 9세기의 추가 매장. 이미 만든 무덤의 통로를 다시 열고 시신을 더 안치하는 일을 추장이라 부릅니다.

7세기 중반은 삼국의 긴장이 높던 때입니다. 9세기는 신라 하대입니다. 그 사이 200년 동안 이 돌방의 위치가 잊히지 않고, 누군가 널길을 다시 열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 가문인지는 도굴이 지운 뒤라 알 수 없습니다. 이름도 없습니다. 남은 사실은 같은 석실이 두 번 쓰였다는 것입니다.

2011년 7월 28일에는 무덤이 다시 열린 것이 아닙니다. 지정 이름이 '경주황성동석실분'에서 '경주 황성동 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고분은 경주 도심 한가운데 있습니다. 2011년 7월 28일, 지정 명칭이 '경주황성동석실분'에서 '경주 황성동 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부장 유물은 도굴로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평지의 봉분 규모와 돌방의 치수, 그리고 발굴이 가리킨 두 번의 장례입니다. 7세기 중반에 모래흙·자갈·질흙을 다져 만들고, 9세기에 널길을 다시 열어 추장했습니다. 빈 돌방이 비어 있던 이유는 도굴입니다. 그 전에 이 방은 200년 간격으로 두 번 쓰였습니다. 7세기 중반에 모래흙과 자갈, 질흙을 다져 지름 9.75미터, 높이 2.0미터의 봉분을 올리고 호석을 둘렀습니다. 돌방은 남북 2.4미터, 동서 1.75미터, 모줄임 천장, 남벽 왼편의 널길입니다. 그 널길을 9세기에 다시 열어 추장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과 혈연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도굴이 부장 유물을 가져간 뒤에도, 토기 파편의 양식과 구조가 두 번의 장례를 남겼습니다. 2011년 7월 28일의 명칭 변경은 그 사실 위에 얹힌 서류의 이름입니다. 경주황성동석실분이 경주 황성동 고분이 되었습니다. 용강동 고분과 함께 꼽히는 평지 굴식돌방무덤이고, 대릉원처럼 우뚝한 봉분군과는 자리와 규모가 다릅니다. 도굴로 빈 방이었지만, 추장이 확인된 석실입니다. 첫 매장은 7세기 중반, 두 번째 매장은 약 200년 뒤인 9세기입니다. 피장자의 이름은 없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황성동 고분은 언제 만들어졌나요?
7세기 중반입니다. 모래흙·자갈·질흙을 다진 봉분에 굴식돌방을 둔 평지 무덤입니다.
장례가 두 번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남은 토기 파편의 양식과 무덤 구조로, 7세기 중반 첫 매장 뒤 약 200년이 지난 9세기에 추장이 있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크기와 내부는 어떤가요?
봉분은 지름 9.75미터, 높이 2.0미터입니다. 돌방은 남북 2.4미터, 동서 1.75미터의 긴 네모이고, 천장은 모줄임이며 널길은 남벽 왼편입니다.
명칭은 언제 바뀌었나요?
2011년 7월 28일 경주황성동석실분에서 경주 황성동 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오픈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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