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1년 9개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지낸 해공 신익희가 효자동 한옥에서 머물다 세상을 떠나기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해방 후 그가 서울에서 머물렀던 거처는 알려진 것만 6곳에 이릅니다. 중국에서 오랜 독립항쟁을 마치고 돌아온 1945년 이후 한미호텔, 창신동 조씨가, 종로 6가 낙산장, 묘동 장씨가, 삼청동 106번지를 거쳐 마지막으로 이른 곳이 효자동 164-2번지였습니다. 이 가운데 정확한 지번이 남아 확인되는 거처는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 자리와 이곳 효자동 가옥 두 곳뿐입니다.
1930년대 집장수가 지은 도시형 한옥
이 집의 시작은 1934년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서울의 도시화 과정에서 주택 공급을 맡았던 이른바 집장수들이 조선시대 양반가 집을 모방하여 지은 도시형 한옥이었습니다.
'ㄱ'자형 안채와 사랑채 2동으로 구성된 겹처마 팔작지붕 오량가 구조였습니다. 오량가는 들보 위에 도리를 다섯 줄로 올려 지붕을 받치는 전통 한옥 가구 방식입니다. 집장수들은 대지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처마를 짧게 내어 채광을 확보했고, 건물 규모에 비해 굵은 대들보와 굴도리를 사용했습니다. 1930년대 서울 도심에 들어선 개량 한옥의 표준적인 모습을 갖춘 셈입니다.

삼청동 공관을 나와 효자동으로
1894년에 태어난 신익희는 임시정부 내무총장 등을 거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제1대, 제2대 국회의장을 맡아 초기 의회 기틀을 다졌죠.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독재체제 강화와 사사오입 개헌 강행에 맞서면서 정치적 궤적은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사사오입 개헌은 1954년 헌법 개정안 의결 당시 정족수 미달이었음에도 사반올림 계산법을 적용해 통과를 강행한 사건입니다.
1954년 8월, 신익희는 국회의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관저였던 삼청동 106번지 공관을 내놓고 이사한 곳이 바로 효자동 164-2번지 한옥이었습니다.
의장직을 내려놓은 뒤 옮겨온 이 소박한 집은 곧 야당 정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신익희는 이 집에서 동지들을 모아 1955년 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치러질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기로 결정했죠. 효자동 집 사랑채는 이승만 정권에 맞서는 야당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이 끊임없이 문턱을 넘나드는 정치적 거점이 되었습니다.
1956년 5월 5일 새벽, 신익희는 호남 지역 유세를 위해 전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열차가 호남선 익산 근처를 지나던 중 그는 갑자기 의식을 잃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효자동 집에 들어온 지 1년 9개월 만이었습니다.
지금
효자동 164-2번지 가옥은 2005년 2월 11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신익희 서거 이후 입주자들의 편의에 따라 외벽과 내벽, 창호 등 일부 구조가 변형되었으나, 1934년 건립 당시의 기본 뼈대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short한 처마와 과대한 대들보 등 1930년대 도시형 한옥의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건축적 특징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의 격동을 견뎌낸 야당 거점의 흔적이 이 길목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