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해 쫓겨나고 병자호란 한복판에서 청나라 사신을 상대했던 외교관 이경직의 묘는 왜 관악산 자락 남현동에 모여 있을까요?
1577년에 태어난 이경직은 이항복과 김장생 밑에서 글을 배웠습니다. 1601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식년시와 증광별시에 연속 합격하여 승문원에서 관직을 시작했습니다. 광해군 9년인 1617년에는 일본에 파견되는 회답사의 종사관으로 참석해 바다 건너 외교 현장을 경험했습니다. 회답사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일본에 정식 국서를 전달하고 포로 송환을 위해 보내던 외교 사절단입니다.
5년의 유배와 전란 속의 외교
바다 건너 외교를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인 1618년, 이경직에게 뜻밖의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조정에서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논의가 크게 일어났을 때, 그는 조정의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폐모론에 동조할 수 없다는 의사의 표시였습니다. 이 일로 탄핵을 받았고, 이후 5년 동안 관직에서 쫓겨나 향리에 묶여 지내야 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조정에 복귀한 그는 전란의 한복판마다 동원되었습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터지자 전라도절도사로서 인조의 피난길을 호종하며 공을 세웠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병조참판으로서 청나라 사신과 직접 교섭을 벌여 화의를 성립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대가 성문 앞까지 밀어닥쳤을 때도 이경직은 가장 앞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조판서 최명길과 함께 모화관으로 나가 청나라 장수를 직접 만났습니다. 상대의 목적이 단순한 강화가 아님을 확인한 그는 즉시 남한산성으로 빠져나가는 인조의 뒤를 바짝 쫓아 입성했습니다. 산성 안에서 중국어에 능통했던 이경직은 청나라와의 험난한 외교 교섭을 주도하며 도승지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관악산 자락에 세워진 신도비
전란이 수습된 뒤 1639년 봄 강화유수로 부임한 이경직은 파괴된 강화도의 전후 복구 작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전란과 국정 부담으로 병을 얻었고, 1640년 7월 임소에서 6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은 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효민'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28년이 지난 1668년 3월, 관악산 자락인 남현동 묘역에 비석 하나가 섰습니다. 신도비였습니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종2품 이상 고관의 생전 업적을 기록하여 무덤 남동쪽에 세우는 특별한 비석입니다.
이 비석의 글은 이경직의 오랜 친우였던 영의정 김류가 지었습니다. 글씨와 머리전서는 이경직의 셋째 아들이자 당시 형조판서였던 이정영이 썼습니다. 이정영은 비석 끝부분에 추기를 덧붙였습니다. 김류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 이경직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문이 내려진 사실과 함께 가문의 자손 명단을 직접 새겨 적었습니다.
지금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산자락에 위치한 이 묘역에는 1668년에 세워진 신도비가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산자락을 따라 올라가면 맨 위에는 이경직의 부친 동지중추부사 이유간의 무덤이 있고, 그 아래에 이경직의 무덤, 다시 그 아래에는 아들 상주목사 이장영의 무덤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1997년 12월 31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5호 '이경직신도비'로 지정되었으나, 묘역 전체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8년 10월 30일 '효민공 이경직 묘역'으로 문화재 명칭이 확장·변경되었습니다. 3대에 걸친 조선시대 묘제 양식을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