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고려 공민왕 20년, 변방 장수를 가르친 학자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 유창은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첫 직책은 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성균관의 성균학우였습니다.
학식과 품성을 갖춘 그는 일찍이 변방의 장수였던 이성계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유창은 이성계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유교적 정치 이념을 강론하는 스승이자 조언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성격이 부드럽고 너그러우면서도 지위가 높아질수록 겸손함을 잃지 않아, 당시 사람들은 그를 당나라의 이름난 재상 누사덕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1392년 고려가 기울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 유창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우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개국공신에 이름을 올려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유창은 지속적으로 경전을 강론하며 국정의 기틀을 다지는 데 참여했습니다. 태종 16년(1416년)에는 옥천부원군이라는 최고의 관작에 봉해졌습니다.

3년 동안 왕의 무덤을 지킨 공신
1408년(태종 8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개국공신의 지위에 있던 유창은 뜻밖의 선택을 내렸습니다. 그는 스스로 태조의 능을 지키는 관직을 맡겠다고 청했습니다. 조정의 높은 관직 대신 능지기 관리가 되어 3년 동안 태조의 능 곁을 지켰습니다. 한때 자신의 제자이자 군주였던 이성계에 대한 예우와 의리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유창은 1421년 세상을 떠나 지금의 서울 강동구 상일동 언덕에 묻혔습니다. 묘역에는 그를 비롯해 자손들의 무덤이 함께 조성되어 종중의 터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비석은 바로 서지 않았습니다.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진 것은 세상을 떠나고 수백 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1846년, 14대손이 비석의 머리를 쓰다
헌종 12년인 1846년, 유창의 묘역 입구 좌측에 비석 하나가 서게 됩니다. 신도비였습니다. 신도비는 왕이나 2품 이상의 고위 관신이 죽은 뒤 그의 평생 업적을 기록하여 무덤 근처에 세우는 비석을 뜻합니다.
이 비석의 글은 판의금부사를 지낸 이광정이 지었고, 글씨는 전 형조판서 이의익이 썼습니다. 비석의 맨 위쪽 계호에 전서체로 이름을 새기는 두전은 유창의 14대손이자 진잠 현감을 지낸 유석이 적었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든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240cm, 비신 높이는 142cm, 너비는 53cm, 두께는 33cm입니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네모기둥 모양의 몸돌을 올리고, 그 위에 기왓골을 새긴 덮개돌을 얹은 양식입니다.
3년 동안 왕의 능을 지켰던 개국공신의 삶은 1846년 세워진 신도비의 문자 속에 담겨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에 위치한 문희공 유창 묘역은 1995년 1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묘역 입구 좌측에는 1846년에 세워진 화강암 신도비가 서 있습니다. 묘역 안에는 유창의 묘와 자손들의 묘, 그리고 조선 시대 석등과 문인석 등 다양한 석조물들이 온전히 남아 있어 당시의 석조 미술과 묘제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곳은 변방의 장수였던 이성계를 가르치고 개국 후 3년간 왕의 능을 지켰던 선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