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명나라 공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벼슬이 깎였던 관료가 어떻게 73세라는 나이에 전쟁터의 일등 공신으로 뒤집기를 이뤄냈을까요?
1560년, 성균관 유생 류희림은 1,000여 명의 유림을 대표해 조정에 상소를 올렸습니다. 당시 다시 세력을 얻어가던 불교를 비판하고 선종과 교종을 모두 폐지하자는 강경한 주장이었죠. 이듬해인 1561년 식년문과 병과로 과거에 합격하며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충청도관찰사(1579년), 황해도관찰사(1585년), 강원도관찰사(1587년) 등 3개 도의 관찰사를 두루 거치며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탄탄해 보이던 그의 관직 생활에 큰 걸림돌이 찾아왔습니다.
공물 부족으로 인한 좌천
1581년, 형조참판으로 재직 중이던 류희림은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외교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으나 사신단이 가지고 간 지방 산물이 지정된 기준보다 부족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책임 추궁을 받고 낮은 벼슬자리로 자리를 옮겨야 했습니다.
외교 현장에서 발생한 물자 부족 문제가 그의 공직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셈입니다. 조정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73세에 맞닥뜨린 전쟁과 피란길
좌천 이후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류희림에게 반전이 일어난 것은 1592년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도성은 무너지고 선조는 북쪽으로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류희림의 나이는 73세로, 관직에서 물러나 쉬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이었습니다.
첨지중추부사였던 류희림은 위험을 무릅쓰고 왕의 뒤를 바짝 따라나섰습니다. 험난한 피란길을 동행하며 왕을 곁에서 모신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즉시 좌승지로 발탁되었습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와 예조참판을 거쳐 1597년에는 동지돈녕부사에 올랐죠.
전쟁 중 선조를 모신 공 외에도, 광해군이 이끌던 분조에 참여해 전쟁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한때 공물 부족으로 낙인찍혔던 노관료가 국가 비상사태에서 국왕의 핵심 참모로 부활한 순간이었습니다.
선조는 1604년 임진왜란 당시 자신을 의주까지 끝까지 모신 신하들에게 내리는 공훈인 호성공신(扈聖功臣)을 포상했습니다. 류희림은 이항복 등과 함께 호성공신 3등에 올랐으며, 문양군(문양공)으로 추봉되었습니다. 광해군 즉위 후에는 분조를 도운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의 분조를 도와 승전에 기여한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 칭호) 2등에도 함께 이름을 올렸습니다.
지금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공원 산책로 한편에는 문양군 류희림과 그의 아버지 문원군 류복룡, 아들 공조참의 류인호까지 문화류씨 3대의 무덤이 늘어서 있습니다. 묘역 내부에는 상석과 망주석, 문인석, 그리고 평생의 업적을 담은 신도비(왕이나 고관의 평생 업적을 기록해 무덤 근처에 세우는 비석)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1991년 문화류씨묘역으로 변경지정된 뒤 201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