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종로 길의 표석에는 김정희 본가 터가 적혀 있습니다. 기와집이나 담장은 없고, 돌판 하나가 그 자리를 가리킵니다.
월성위와 화순옹주
이 터가 경주 김씨 본가로 잡힌 계기는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과 부인 화순옹주 때입니다. 왕실의 옹주와 혼인한 월성위의 대에 이곳이 본가가 되었습니다. 가문의 교유와 살림이 이루어지던 중심이 이 땅이었습니다.
그 혈통에서 1786년에 태어나 1856년까지 산 사람이 추사 김정희입니다.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이고 화가입니다. 필체로 서예의 한 경지를 열었고, 고증학과 금석학으로 학문의 범위를 넓혔으며, 문인화를 남겼습니다. 글씨·그림·학문적 성과는 조선 말기 문화의 성과로 평가됩니다. 그는 이 경주 김씨 본가의 혈통과 학문 전통을 이은 인물로 표석에 연결됩니다. 이 터에서 그가 실제로 살았는지, 본가 건물이 어느 해에 없어졌는지는 표석이 단정하지 않습니다.
집이 사라진 뒤의 돌
한때는 명문가의 본가 건물이 있던 자리입니다. 목조 건물과 정원의 실물은 사라졌고, 옛 모습은 사료와 기록으로만 짐작합니다. 그 자리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선 뒤, “김정희 본가 터”라고 적은 서울시 역사문화 표석이 남았습니다. 월성위 김한신·화순옹주 때의 본가에서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시간을, 돌판 하나가 표시합니다.
공간의 실물은 없어도 표석이 가리키는 사실은 남아 있습니다. 가문의 출발과 터의 변화를 읽는 자리는 종로의 그 표석입니다.
표석이 적는 사람과 적지 않는 것
돌에 묶인 첫 세대는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과 부인 화순옹주입니다. 왕실의 옹주와 혼인한 월성위의 대에 이 땅이 경주 김씨 본가가 되었습니다. 가문의 교유와 살림이 있던 중심이라는 설명이 이 터에 붙습니다.
그다음 이름은 1786년에 태어나 1856년에 세상을 떠난 추사 김정희입니다. 조선 말기의 학자, 서예가, 화가입니다. 필체로 서예의 한 경지를 열었고, 고증학과 금석학으로 당대의 학문을 넓혔으며, 문인화를 남겼습니다. 글씨와 그림과 학문의 성과는 조선 말기 문화의 성과로 평가됩니다. 표석은 그를 이 본가의 혈통과 학문 전통을 이은 인물로 연결합니다.
표석이 단정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김정희가 이 터에서 실제로 살았는지, 본가 건물이 어느 해에 없어졌는지는 적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건물의 실물이 없다는 점입니다. 명문가의 목조 집과 정원은 사라졌고, 옛 모습은 사료와 기록으로만 짐작합니다. 그 자리에 도시의 길과 건물이 들어선 뒤, “김정희 본가 터”라는 서울시 역사문화 표석이 종로구에 남았습니다. 자료의 기준 시점은 역지사지, 2026년 3월입니다.
월성위와 화순옹주에서 시작된 경주 김씨 본가가, 1786–1856년의 추사로 이어진다는 표시가 그 돌 하나에 있습니다. 현장에 기와집은 없습니다.
지금
터는 종로구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경주 김씨 본가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서울시 역사문화 표석이 그 자리였음을 알립니다. 표석 자료의 기준은 역지사지, 2026년 3월입니다.
1786–1856년의 학자·서예가·화가 김정희와, 증조부모 월성위 김한신·화순옹주 이래의 본가가 같은 표석에 적힌 이유입니다. 현장에 남은 것은 그 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