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송파구 석촌동. 약 100년 전 이 들판을 덮은 무덤은 290여 기였습니다. 그 숫자는 어디로 줄었을까요.
동네 이름은 석촌동(石村洞)입니다. 돌이 많아 우리말로 돌마을, 한자로 석촌이라 불렸습니다. 주민이 밭을 갈거나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면 커다란 자연석과 다듬은 돌이 나왔습니다. 그 돌은 자갈밭의 돌이 아니었습니다. 한강 변에 터를 잡은 백제 왕과 귀족의 무덤 부재였습니다.
이 터가 근현대 기록에 들어온 것은 1910년대입니다. 일제강점기 첫 조사가 그때 이루어졌습니다. 일제가 만든 고적 조사 보고서와 지적도에는 석촌동과 인근 들판의 고분이 290여 기로 적혀 있습니다. 나지막한 언덕마다 돌무덤과 흙무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장군총보다 컸던 3호
그중 3호 무덤이 조사를 끌었습니다. 흙을 돋워 만든 무덤과 구조가 달랐습니다. 높은 바닥을 평평하게 고른 뒤, 크고 길쭉한 돌로 밑테두리를 둘렀습니다. 자연석을 층층이 쌓아 3단이 되었습니다. 형식 이름은 기단식 돌무지무덤, 곧 기단식 적석총입니다. 고구려 무덤 전통이 강한 형식입니다.
조사 결과, 만주 통구의 고구려 장군총보다 가로와 세로가 더 컸습니다. 한강 유역 백제 초기 지배층의 무덤이, 규모에서는 그 적석총보다 크게 확인된 셈입니다.
밭이 된 1호·2호·5호
1910년대의 그 분포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무덤의 가치와 성격이 밝혀지기 전에, 생계를 위한 농경지가 무덤 위로 덮였습니다.
1호와 2호가 그 자리입니다. 주민이 무덤이 있던 곳을 밭으로 개간해 농사를 지었습니다. 상부 구조는 무너졌습니다. 내부 구조와 함께 묻힌 유물은 훼손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5호도 같습니다. 조사가 끝나지 못한 채 남았습니다. 무덤 주변을 두른 2단 돌담의 흔적만 확인되었습니다. 내부의 정밀한 구조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독무덤인 옹관묘나 작은 돌방무덤에 묻힌 사람들보다 높은 신분의 지배계층 무덤이었습니다. 그래도 당장의 생계 앞에서 형태가 하나씩 사라졌습니다.
잠실·송파의 도로 밑
결정적인 감소는 한국전쟁 이후의 도시화와 재개발이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서울이 남쪽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잠실과 송파 일대는 신도시가 되었습니다. 논과 밭, 나지막한 언덕 위로 도로가 뚫렸습니다.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들어섰습니다. 290여 기의 고분은 파헤쳐지거나, 도로 밑과 아파트 주차장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들판을 채우던 무덤 가운데 개발을 피해 남은 것은 8기 정도입니다.
정비 조사는 그 뒤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사라진 수백 기는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훼손된 흔적을 추스르고, 남은 무덤을 봉안해 공원으로 복원했습니다. 2011년 7월 28일, 공식 명칭이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에서 ‘서울 석촌동 고분군’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무덤들은 가락동·방이동 고분과 함께 초기 백제의 문화와 한성기 역사를 알려 주는 자료로 남습니다.
지금
송파의 높은 건물과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 복원된 8기가 있습니다. 무덤 주변에는 산책로가 나 있습니다. 주민이 그 길을 걷습니다.
290여 기가 8기가 된 경로는 두 겹입니다. 먼저 농경지가 1호·2호·5호의 내부를 지웠습니다. 이어서 1970~80년대 잠실·송파의 도로와 아파트가 나머지를 덮었습니다. 1910년대 보고서의 숫자는, 지금 공원 밖에 있는 도시의 지층으로 들어갔습니다.
1910년대의 290여 기와 지금의 8기. 그 사이가 농경지와 1970~80년대의 개발입니다. 파헤쳐진 자리와 묻힌 자리는 도로 밑, 아파트 주차장 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