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 신하의 자리에 들어간 51세 황제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 기로소 전례와 광화문 네거리의 만세문

기로소의 문턱은 정2품 이상, 나이 70세였습니다. 고종은 즉위 40년, 51세에 들어갔습니다.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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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광화문 네거리의 비각. 51세 임금이, 왜 70세 신하의 기관에 이름을 올렸을까요.

바탕에는 기로소(耆老所)가 있습니다. 조선의 정2품 이상 문관을 우대하는 제도입니다. 고려의 기영회를 이었습니다. 정2품 이상을 지낸 문신 가운데 70세를 넘긴 신하를 예우하는 최고 명예 기관이었습니다. 오래 국정에 있던 노신을 국가가 높이는 자리입니다.

임금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신하에게 적용되는 70세는, 당시 임금이 닿기 어려운 나이였습니다.

60세의 태조, 앞당긴 숙종과 영조

태조는 60세가 되던 해에 기영회에 들어가 이 전례를 열었습니다. 그 뒤 왕들이 오래 살지 못해, 기로소에 들어갈 임금이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70세는 물론 60세를 넘긴 임금도 드물었습니다.

조선 후기, 숙종과 영조가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태조의 전례를 따라 일정보다 일찍 기로소에 들어갔습니다. 70세에 못 미쳐도, 환갑에 가까운 임금의 입소를 나라의 경사로 삼았습니다. 통치의 안정과 장수를 기리는 계기였습니다.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출처: 위키백과「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51세의 칭경

고종은 재위 1863년부터 1907년까지입니다. 즉위 40년이 되고 나이가 51세가 되었을 때, 신하들이 건의했습니다. 숙종과 영조가 60세를 바라보며 앞당겨 들어간 전례를 든 것입니다. 51세는 원칙인 70세보다 젊고, 앞선 임금들의 60세보다도 젊었습니다. 신하들은 즉위 40주년과 겹쳐 고종을 기로소에 모시고자 했습니다.

고종은 그 건의를 받아들였습니다. 51세의 입소가 칭경(稱慶)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고종은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칭호를 처음 썼습니다.

그래서 이 비는 기로소 입소만 적은 돌이 아닙니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 황제 칭호, 즉위 40년의 통치를 함께 기념합니다. 태조의 기영회에서 숙종·영조의 앞당긴 입소로 이어진 전례가, 황제의 이름 아래 다시 적힌 것입니다.

순종의 글씨, 만세문

비석에는 당시 조정의 인물과 황실이 직접 참여했습니다. 비몸 앞면 글씨는 황태자 순종이 썼습니다. 아버지가 즉위 40년과 기로소 입소를 맞는 일을 기리느라, 후계자가 붓을 든 것입니다.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습니다. 즉위 40년, 기로소 입소, 대한제국 선포를 담은 글로, 민병석의 글씨가 황태자 순종의 앞면 글씨와 함께 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완성된 비는 거북 모양 받침인 귀부 위에 비몸을 세우고, 용을 새긴 이수(비석 머리)를 얹었습니다. 비바람을 막으려고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정자형 건물 비전(碑殿)을 지어 비를 감쌌습니다.

기단 둘레에는 돌난간이 있습니다. 남쪽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가운데칸 위에는 무지개 모양으로 깎은 돌이 있습니다. 그 돌에 무병장수와 태평을 기원하는 글자 ‘만세문(萬歲門)’이 새겨져 있습니다.

70세 이상 공신을 예우하던 기로소가, 숙종·영조의 앞당긴 입소를 거쳐, 고종 51세의 칭경과 황제 칭호와 함께 이 비에 모였습니다.

지금

광화문 네거리 한쪽에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가 있습니다. 비전을 두른 돌난간과 만세문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만세문 글씨는 비전 남쪽, 무지개 모양 돌문에 있습니다. 정2품 이상 70세 신하를 기리던 제도와, 51세 임금의 장수와 태평을 적던 염원이 같은 난간 안에 있습니다. 글씨를 쓴 사람은 황태자 순종이고,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습니다.

51세가 가능했던 이유는 70세 원칙 밖에 있던 전례 때문입니다. 태조가 60세에 기영회에 들어갔고, 숙종과 영조가 60세를 바라보며 앞당겼습니다. 신하들은 그 전례로 즉위 40년의 고종에게 입소를 건의했고, 고종이 받아들였습니다.

기로소는 정2품 이상 문관 가운데 70세를 넘긴 신하를 우대하는 기관입니다. 고려 기영회를 이었습니다. 임금도 들어갈 수 있었으나, 70세는 당시 임금에게 먼 나이였습니다. 태조가 60세에 기영회에 들어간 뒤, 60세를 넘긴 임금이 오랫동안 드물었습니다. 숙종과 영조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태조의 전례를 따라 일찍 들어갔습니다.

고종의 재위는 1863년부터 1907년까지입니다. 즉위 40년, 51세에 신하들이 숙종·영조의 전례를 들어 입소를 건의했습니다. 51세는 70세보다 젊고, 앞선 임금들의 60세보다도 젊습니다. 고종이 받아들여 칭경이 되었습니다. 같은 무렵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칭호를 처음 썼습니다. 비는 입소와 국호, 황제, 40년 통치를 함께 기념합니다.

비몸 앞면은 황태자 순종의 글씨입니다.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습니다. 귀부 위에 비몸, 그 위에 용을 새긴 이수가 있습니다. 비전은 앞 3칸 옆 3칸의 정자형입니다. 기단의 돌난간, 남쪽 돌기둥과 철문, 가운데칸 위의 무지개 돌에 ‘만세문’이 있습니다. 무병장수와 태평을 적은 이름입니다.

51세가 70세의 자리에 들어간 까닭은, 태조 60세와 숙종·영조의 앞당긴 입소를 신하들이 즉위 40년에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광화문 네거리의 비전과 만세문이 그 칭경의 돌입니다.

정2품, 70세, 기영회의 계승. 태조의 60세. 숙종과 영조가 60세를 바라보며 앞당긴 입소. 고종은 즉위 40년에 51세였습니다. 신하의 건의를 받아 칭경이 되었고, 대한제국 국호와 황제 칭호가 같은 비에 같이 적혔습니다. 순종이 비몸 앞면을 쓰고, 윤용선이 비문을 지었으며, 민병석이 그 글을 썼습니다. 귀부와 이수, 앞 3칸 옆 3칸의 비전, 남쪽 철문 위 만세문. 51세가 들어간 근거는 70세 원칙의 예외로 이미 쓰이던 그 전례입니다. 광화문 네거리의 돌난간 너머에 그 비와 만세문이 있습니다. 황태자 순종의 글씨와 윤용선·민병석의 비문이 그 돌에 있습니다. 남쪽 문의 이름은 만세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기로소는 누구의 자리였나요?
정2품 이상 문관 가운데 70세가 넘은 신하를 우대하던 기관입니다. 고려의 기영회를 이었습니다. 임금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고종은 70세가 아닌데 어떻게 들어갔나요?
태조가 60세에 기영회에 들어간 전례가 있고, 숙종과 영조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앞당겨 들어갔습니다. 신하들의 건의로 고종은 즉위 40년, 51세에 입소했습니다.
비석 글씨는 누가 썼나요?
비몸 앞면은 황태자 순종입니다.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습니다.
만세문은 어디에 있나요?
비전 돌난간 남쪽 철문의 가운데칸 위, 무지개 모양 돌에 ‘만세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문화재공간정보, 위키백과「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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