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서울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동 토성은 백제가 한성기, 곧 기원전 18년부터 AD 475년까지 한반도 중심부를 다스리던 시기의 첫 도성이자 하남위례성으로 입증된 평지 토성입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담장에 이어져 성벽의 흔적만 드문드문 남아 있습니다.
이곳이 백제의 500년 도성이라는 점이 알려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이 흙성은 한강변의 낮은 언덕, 경작지, 주민의 터전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성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훼손되어, 흙 속에 묻힌 채 잊혀 갔습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한강을 범람시켰습니다. 성벽과 거주지 일대의 흙이 물에 씻겨 내려갔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재앙이었고, 땅속에 있던 유물이 밖으로 나온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물에 드러난 것은 평범한 토기만이 아니었습니다. 정교한 중국제 청동자루솥과 허리띠장식처럼, 당대 상류층이나 왕실에서 쓸 만한 유물이 다량으로 나왔습니다. 한강변 흙더미에서 나온 유물의 격이 달랐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흙성에 학계와 관계자의 시선이 모였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조선고적 제27호로 지정됐고, 광복 이후 1963년에는 국가 지정 문화유산 사적으로 지정됐습니다.
사적으로 지정된 뒤에도 땅의 쓰임은 이어졌습니다. 6·25 전쟁과 도시화를 거치며 토성 내부와 성벽 주변은 주민 거주지와 경작지로 계속 쓰였습니다. 집이 들어서고 길이 넓어지면서, 둘레 3.5km였던 토성은 한강과 맞닿은 서쪽 성벽이 크게 유실되었습니다. 지금은 약 2.1km의 성벽만 남아 있습니다. 성벽 위를 밟고 지나던 사람 가운데 이곳이 어떤 자리인지 모르는 이가 많았습니다.

2000년, 토성 내부의 경당지구를 비롯한 구역에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성벽 기초부 너비는 43m, 높이는 11m가 넘는 대규모 토성이었습니다. 흙을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구조가 아니다. 백제 사람들은 성벽 중심부 하단에 고운 뻘흙을 깔아 기초를 다진 뒤, 안팎으로 진흙과 모래흙을 번갈아 다져 쌓는 판축기법을 썼습니다.
성벽 중간에는 식물유기체를 깔거나 자갈을 섞어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토루를 보강했습니다. 한강변의 습지와 뻘밭 위에 높이 11m가 넘는 흙의 장벽을 올린 축성입니다.
토성 내부 발굴에서는 왕실 및 국가 의례와 관련된 유구와 함께 수만 점의 유물이 나왔습니다. 1925년 대홍수 때의 중국제 청동자루솥과 허리띠장식에 이어, 토기와 기와, 도구들이 한성백제의 문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2000년 발굴 뒤 학계의 논의가 이어졌고, ‘풍납토성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하남위례성’이라는 점이 정설로 자리 잡았습니다. 위치가 불분명해 추측만 많던 백제의 첫 도성이, 아파트 단지와 빌라촌 아래에서 이름을 찾은 해입니다.
주민의 생활 터전으로 쓰이며 깎이고 가려졌던 흙성입니다. 20세기 초에는 한강변 언덕이나 경작지로 여겨지다가,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 중국제 청동자루솥과 허리띠장식이 나왔습니다. 1936년 조선고적 제27호, 1963년 사적 지정 이후에도 6·25 전쟁과 도시화로 집과 길이 성벽 안팎을 차지했습니다. 원래 둘레 약 3.5km 가운데 한강 쪽 서쪽 성벽이 유실되어 약 2.1km가 남았습니다. 2000년 경당지구 발굴은 기초 너비 43m·높이 11m의 판축 성벽과 왕실·국가 의례 유구, 수만 점의 유물을 확인했습니다. 이 조사를 거쳐 풍납토성이 백제 첫 도읍 하남위례성이라는 학계 정설이 섰습니다.
지금
풍납동 토성은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이면서, 주민이 사는 주거지와 한자리에 있습니다. 훼손된 성벽을 보존하고 역사적 가치를 밝히려는 유적공원화 작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벽 기초부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에서 흙으로 된 성벽 잔존부 약 2.1km가 골목과 아파트 사이로 이어집니다.
발굴 터와 판축의 흔적은 유적공원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청동자루솥과 허리띠장식이 나오고, 1936년 조선고적 제27호와 1963년 사적 지정을 거친 뒤, 2000년 경당지구 발굴에서 너비 43m·높이 11m의 성벽과 수만 점의 유물이 확인되면서 하남위례성이라는 정설이 선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