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명성황후가 숨은 내관의 성북동 정원

서울 성북동 별서 · 황윤명의 쌍류동천과 갑신정변

성북동 북쪽 비탈의 정원은 조선 고종 대 내관 황윤명이 가꾼 별서입니다. 1884년 그 정원이 왕후의 피난처가 된 이유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서울 성북동 별서 전경
서울 성북동 별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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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성북동 골짜기는 이 별서가 들어서기 전부터 도성 안팎 사람들에게 알려진 경승지였습니다. 굽은 골짜기와 물, 수목이 어우러진 곳으로, 자연을 보며 시를 읊던 이들이 찾았습니다. 이 지형을 알아본 사람이 고종 대의 내관 황윤명입니다. 그는 이곳을 자신의 별서로 다듬었습니다.

황윤명은 골짜기의 자연을 없애지 않고, 인공을 맞춰 나갔습니다. 계곡 물줄기를 따라 정원의 공간을 나누었습니다. 앞뜰에는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하나로 모이는 지형을 살려 ‘쌍류동천(雙流洞天)’이라 부르게 했습니다. 두 물줄기가 만나 동천을 이루는 정원의 첫 공간입니다.

안뜰로 들어서면, 인공으로 산의 형세를 돋운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정원을 감쌉니다. 이곳에는 수령 200년에서 300년에 이르는 엄나무를 비롯해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가 숲을 이룹니다. 그 아래 연못이 ‘영벽지(影碧池)’입니다.

서울 성북동 별서 바위와 정원 경관
서울 성북동 별서 바위와 정원 경관
출처: 위키백과「서울 성북동 별서」

황윤명은 안뜰 바위에 글씨를 새겼습니다. 연못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길목 바위에 ‘물길을 끌어와 작은 연못을 만든다’는 뜻의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를 새겼고, ‘장외가(檣外家)’, ‘청산일조(靑山壹條)’를 수풀 사이 바위에 남겼습니다. 바깥뜰에는 샘물 ‘고엽약수’가 있습니다. 계류와 바위, 가산과 수목이 한 정원에 있습니다.

내관 황윤명이 휴식과 사색을 위해 가꾼 이 정원은, 조선 왕실의 정치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1884년,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한양 도성을 흔들었습니다. 궁궐 안팎이 혼란에 빠지고 국왕과 왕실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자, 왕실에서는 피신할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 순간 명성황후가 피난처로 선택한 곳이 성북동 황윤명의 별서입니다.

궁 안에서 왕과 왕후를 가까이 모시던 내관 황윤명. 그가 도성 밖 계곡에 가꾸어 둔 개인 별서가, 갑신정변 때 명성황후의 피난처로 쓰였습니다.

두 골짜기가 만나는 쌍류동천의 지형은 바깥 시선을 가리는 자연 장막이 되었고, 용두가산의 고목 숲은 은신한 명성황후를 가렸습니다. 바위의 글씨와 영벽지의 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풍류를 위해 만든 내관의 정원이, 나라의 운명이 걸린 밤에 피난처가 된 기록이 이 별서에 남아 있습니다.

별서가 생기기 전 성북동 골짜기는 이미 경승지였고, 물과 수목 사이에서 시를 읊던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고종 대의 내관 황윤명이 그 지형을 별서로 다듬었습니다. 앞뜰은 두 골짜기 물이 모이는 쌍류동천, 안뜰은 인공 산세인 용두가산입니다. 용두가산에는 수령 200년에서 300년의 엄나무와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가 있고, 그 아래 연못이 영벽지입니다. 바위에는 인수위소지, 장외가, 청산일조가 새겨져 있고, 바깥뜰에는 고엽약수가 있습니다. 1884년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도성을 흔들자, 궁에서 왕후를 모시던 황윤명의 이 별서가 명성황후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쌍류동천의 지형과 용두가산의 숲이 그 은신을 가렸습니다. 내관의 정원이 왕후의 피난처가 된 해가 1884년입니다.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조선시대 민가 정원으로, 쌍류동천·용두가산·영벽지·고엽약수와 바위 글씨가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

서울 성북동 별서는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조선시대 전통 민가정원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시냇물을 따라 이어진 앞뜰의 쌍류동천, 안뜰의 영벽지, 용두가산의 고목은 남아 있습니다. 바위에 새긴 황윤명의 글씨 인수위소지, 장외가, 청산일조도 수풀 사이에 있습니다.

자연 계류와 암석, 나지막한 가산과 수목이 있는 이 정원에서, 1884년 갑신정변 때 명성황후가 황윤명의 별서로 피신한 일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관이 가꾼 휴식의 정원이 왕후의 피난처가 된 해가 그 1884년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성북동 별서는 누구에 의해 조성되었나요?
조선 고종 대의 내관인 황윤명이 성북동 계곡에 조성하였습니다.
성북동 별서에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얽혀 있나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가 피난처로 사용하였습니다.
별서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주요 경관 요소는 무엇인가요?
물줄기가 하나로 모이는 쌍류동천, 숲을 이룬 용두가산, 영벽지 연못과 바위 글씨(인수위소지, 장외가, 청산일조), 바깥뜰의 고엽약수 등이 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문화재공간정보, 위키백과 「서울 성북동 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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