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가 다섯이 글을 새긴 비석, 절은 중종 때 헐렸다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 흥복사에서 원각사로, 탑골에 남은 비

성종 2년(1471)에 세운 비석에는 문장가 다섯 이름이 있습니다. 그 절의 전각은 지금 없습니다.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우측면 사진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우측면 사진
출처: 본 저작물은 '국가유산청'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우측면 사진'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유산청, www.kh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

종로 탑골공원 담장 안, 돌거북이 비를 이고 있습니다.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습니다. 용 두 마리가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들고 비몸돌을 감쌉니다.

흥복사가 관아가 되었다가, 원각사가 되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이 자리에는 조계종 본절 흥복사가 섰습니다. 조선이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불교의 자리는 줄어듭니다. 조계종이 폐지된 뒤 이 절은 사찰 기능을 잃고 한동안 관아로 쓰입니다.

세조는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른 뒤 불교에 깊이 기댑니다. 세조 11년(1465), 왕실 기구 간경도감에서 원각경을 한글로 번역해 간행합니다. 그 무렵 양주 회암사 사리탑의 사리를 모셔 오는 행사가 열립니다. 사리 이운과 경전 번역을 기념하고 왕권을 신성화하려고, 관아로 쓰이던 옛 흥복사 터를 다시 큰 사찰로 짓습니다. 절 이름은 원각사입니다. 도성 한복판에 전각이 들어섰고, 하얀 대리석 10층 석탑이 섰습니다.

성종 2년(1471), 원각사를 세운 내력과 세조의 뜻을 적기 위해 비를 세웁니다. 지금 보는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입니다.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출처: 위키백과「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다섯 사람과 돌거북

비 이름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는 강희맹이 전서체로 썼습니다. 앞면 창건 내력은 김수온이 짓고 성임이 썼습니다. 뒷면 추기는 서거정이 짓고 정난종이 썼습니다. 강희맹, 김수온, 성임, 서거정, 정난종. 유학을 받들던 명신들이 왕명으로 사찰 창건비를 짓고 쓴 기록입니다.

받침은 돌거북, 구부입니다. 목을 길게 빼지 않고 앞으로 숙였습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니고 사다리꼴 평행선입니다. 등 중앙에는 연꽃잎이 있고,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이 있습니다. 비몸돌 위는 용 두 마리가 감쌉니다. 신라·고려 비와 다른, 머릿돌 없는 조선 초기의 형태입니다.

전각은 없어지고 탑골이 남다

성종 대를 지나 연산군·중종 대에 사림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도성 한복판의 큰 사찰은 유학자들에게 그대로 두기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중종 때 원각사는 철거됩니다. 목조 전각은 헐리거나 다른 용도로 나갔습니다. 불상과 당우는 사라졌습니다.

돌로 된 10층 석탑과 이 비는 부수지 않고 남았습니다. 전각이 빈 자리에 탑과 비만 남았고, 사람들은 탑이 남은 골짜기라 하여 탑골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지금 그 터는 종로 탑골공원입니다. 비는 유리 보호 아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름을 다시 따라가면, 흥복사, 관아, 1465년 전후의 원각사, 1471년의 비, 중종 때의 철거입니다. 글씨를 남긴 사람은 강희맹·김수온·성임·서거정·정난종 다섯입니다. 절은 없고, 10층 석탑과 대원각사비가 탑골에 남아 있습니다.

태조 때 이 자리는 조계종 본절 흥복사였습니다. 도성 한복판의 절이었지만, 유교를 통치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조계종이 폐지되고 절은 관아로 바뀝니다. 염불 대신 행정이 있던 자리입니다. 세조 11년, 간경도감이 원각경을 한글로 옮겨 간행하고, 양주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모셔 오는 행사가 열립니다. 세조는 계유정난 이후의 왕권과 그 기념을 이 터에 얹습니다. 관아로 쓰이던 흥복사 터에 원각사를 다시 세우고, 하얀 대리석으로 10층 석탑을 올립니다.

성종 2년에 그 내력을 비에 새깁니다. 전액 ‘대원각사지비’는 강희맹의 전서입니다. 앞면은 김수온의 문장에 성임의 글씨, 뒷면 추기는 서거정의 문장에 정난종의 글씨입니다. 유학의 명신 다섯이 왕명으로 절의 창건비를 맡은 기록이 돌 한 면에 모입니다.

구부, 곧 돌거북은 목을 길게 빼지 않고 앞으로 숙입니다. 등에는 육각형 대신 사다리꼴 평행선이 있고, 가운데는 연꽃잎, 다리와 꼬리에는 물고기 비늘이 있습니다. 머릿돌은 따로 없고 용 두 마리가 보주를 든 채 비몸을 감쌉니다. 신라·고려 비에서 보이던 머릿돌 있는 형식과 다른, 조선 초기의 형태다.

그 절의 전각은 중종 때 억불 정책으로 철거됩니다. 연산군과 중종 대에 커진 사림의 목소리는, 도성 안의 큰 사찰을 그대로 두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목조 당우와 불상은 헐리거나 다른 데로 나가고, 돌인 10층 석탑과 이 비는 부수지 못한 채 남습니다. 빈 터에 탑만 있다 하여 탑골이라 부른 이름이, 지금 종로 탑골공원으로 이어집니다. 글과 탑은 돌이라 남았고, 전각은 중종 때 헐렸습니다.

지금

탑골공원 안에서 비에 다가가면 성임·정난종의 글씨와 강희맹의 전액이 남아 있습니다. 돌거북 다리의 물고기 비늘, 비 위를 감싼 용도 그대로입니다. 중종 때 전각은 철거됐습니다. 세조가 다시 세운 원각사의 기록은, 다섯 사람이 1471년에 새긴 이 비와 10층 석탑에 남아 있습니다.

유리 보호 아래의 비는 흥복사와 관아와 원각사를 거친 터의 마지막 글입니다. 1465년 전후의 사리 이운과 원각경 번역, 1471년의 건립, 중종의 철거. 절은 사라졌고, 문장가 다섯의 이름과 10층 석탑은 탑골에 남았습니다.

종로 한복판에서 이 비를 읽는 순서는 사람 이름부터입니다. 강희맹의 전액, 김수온과 성임의 앞면, 서거정과 정난종의 뒷면. 돌거북의 사다리꼴 등무늬와 물고기 비늘, 용 두 마리의 보주. 세조가 1465년 무렵 다시 세운 원각사의 전각은 중종 때 없어졌습니다. 비와 10층 석탑이 탑골에 남은 것이, 다섯 문장가의 글이 절보다 오래 남은 이유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대원각사비는 누구의 글씨와 문장으로 만들어졌나요?
비석의 이름(전액)은 강희맹이 썼고, 앞면 문장은 김수온이 짓고 성임이 썼습니다.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이 짓고 정난종이 썼습니다. 당대 조선 최고의 문장가와 서예가 5명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원각사는 왜 지금 건물은 없고 석탑과 비석만 남아 있나요?
세조 대에 성대하게 재건되었으나, 중종 대에 이르러 억불 정책에 따라 사찰 건물이 모두 철거되었습니다. 석재로 만들어진 십층석탑과 대원각사비만 부서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게 되었습니다.
대원각사비 조각의 미술적 특징은 무엇인가요?
머릿돌을 따로 두지 않고 두 마리 용이 보주를 들며 비몸돌을 감싸는 형태입니다. 받침돌인 돌거북에는 사다리꼴 평행선 등무늬와 연꽃잎, 그리고 다리와 꼬리에 물고기 비늘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포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도에서 보기 유적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