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강서구 가양동 궁산. 한강과 안양천이 만나는 쪽을 내려다보는 능선 위에 성터가 있습니다. 사적으로 지정된 서울 양천고성지입니다.
둘레 약 220m의 테뫼식 산성
궁산 주능선과 가지능선 상단을 두른 테뫼식 산성입니다. 둘레는 약 220미터, 면적은 2만 9,370제곱미터(약 8,900평)입니다. 한강 쪽 북쪽 경사는 급하고, 남쪽은 상대적으로 완만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에 양천의 이 산성터가 나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당시 이미 폐성으로 적혀 있습니다. 성으로서의 기능이 끝난 옛터라는 기록입니다.
행주로 가기 전
임진왜란 때 삼도순찰사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 근왕군이 한양을 되찾으러 북상합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권율은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들어가기 직전 이 양천고성지에 진을 치고 머물렀습니다. 강 건너를 살핀 뒤 건너가 싸운 곳이 행주대첩의 현장입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그 싸움 전야의 거점으로 전합니다.
한강 어귀를 지키던 시설로는 행주산성, 파주 오두산성, 그리고 이 양천고성지가 함께 꼽혀 왔습니다.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길과 땅길을 동시에 보는 자리입니다.

폐성으로 적힌 뒤에도, 임진왜란이 닥치자 장수와 군사가 이 요충으로 모였다는 전승입니다. 성벽의 구실은 끝나 있었어도, 한강 하구를 굽어보는 지형은 그대로였습니다.
진지와 주둔
시련은 조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군 진지를 쌓으면서 성터 상당 부분이 파였습니다. 광복 뒤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성벽 원형이 크게 훼손됩니다.
지금 성 안쪽에는 돌을 채워 넣었던 적심석과, 바깥을 쌓았던 성돌이 드문드문 보입니다. 남쪽 벽면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궁산 아래에는 조선 시대 지방 교육 기관인 양천향교가 있습니다.
숫자를 다시 두면, 둘레 약 220미터, 면적 약 8,900평, 북쪽은 급하고 남쪽은 완만한 테뫼식 산성입니다. 지리서는 폐성이라 했고, 전승은 권율이 행주 직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남은 것은 적심석과 성돌입니다.
궁산은 강서구 가양동의 나지막한 산입니다. 주능선과 가지능선 위를 테뫼식으로 둘렀습니다. 한강을 향한 북쪽은 경사가 급해 오르기 어렵고, 남쪽은 완만합니다. 한강과 안양천이 합치는 어귀를 내려다보는 자리라 물길과 땅길을 함께 보는 요새로 꼽혔습니다. 같은 어귀의 시설로 행주산성과 파주 오두산성이 함께 거론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가 이 산성터를 적습니다. 그 가운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미 폐성이라고 했습니다. 성벽의 구실은 끝났어도 하구를 굽어보는 위치는 남아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삼도순찰사 권율의 전라도 근왕군이 한양을 향해 북상합니다. 전승은 그가 행주산성으로 들어가 싸우기 직전 이 양천고성지에 진을 쳤다고 합니다. 폐성으로 적힌 뒤의 일이라, 온전한 성벽이 있어서가 아니라 요충이라서 모였다는 전승에 가깝습니다.
근현대의 훼손은 별개의 층입니다. 일제강점기에 군 진지를 만들면서 성터를 팠고, 광복 뒤 미군 주둔으로 원형이 더 줄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안쪽에 채웠던 적심석과 바깥 성돌입니다. 남쪽 벽면에서 그 돌을 확인할 수 있고, 산 아래에는 양천향교가 있습니다. 지리서의 폐성과 권율의 전승과 일제·미군의 훼손이, 둘레 약 220미터의 같은 능선에 있습니다.
지금
궁산 정상에 오르면 한강이 내려다보입니다. 남쪽 벽에는 성돌과 적심석이 있고, 산 아래에는 양천향교가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폐성과, 권율이 한강을 건너기 전 머물렀다는 전승이 같은 능선에 있습니다. 일제 진지와 미군 주둔으로 원형은 크게 줄었습니다.
면적 2만 9,370제곱미터, 약 8,900평. 폐성이라 적힌 성이 행주 직전의 거점으로 전하는 이유는, 성벽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한강 하구를 보는 위치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