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서울 서초구 우면동 291-1, 태봉산 정상. 왕실이 태를 묻고 표석을 세운 자리입니다. 주인은 월산대군 이정(1454~1488)입니다.
태실도감과 태봉
조선에서는 왕가에 출산이 있으면 임시 관청 태실도감을 두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으로 여긴 태를 명당에 묻고 태봉을 만드는 일은, 국운과 왕실의 안녕을 비는 의식이었습니다. 태봉은 태를 봉안한 자리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우면동 정상에 묻힌 태의 주인은 성종의 친형입니다.
이정은 조선 9대 성종의 형이고,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맏아들입니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입니다. 적통의 순서로 보면 왕위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월산군, 그리고 왕이 된 동생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습니다. 할아버지 세조는 맏손자 이정을 아껴 궁궐에서 키웁니다. 7세가 되던 1460년(세조 6) 월산군에 봉해집니다.
1468년 예종 즉위년에, 동생 잘산군(훗날의 성종)과 함께 현록대부에 임명됩니다. 현록대부는 종친 관직의 으뜸에 해당합니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직계 맏아들인 월산군은 왕위 계승 후보였습니다. 왕실 어른들의 결정으로 왕위는 동생 잘산군에게 갑니다. 그가 성종입니다.
성종 즉위 후 1471년(성종 2), 이정은 월산대군으로 봉해집니다. 같은 해 3월,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좌리공신 2등에 책봉되고 전지와 노비를 받습니다.
희우정을 망원정으로
이정은 서호 양화도 북쪽 언덕의 희우정을 고쳐 짓습니다. 이름을 망원정으로 바꿉니다. 그 정자에 서적을 쌓아 두고 강물을 보며 시와 문장을 읊었습니다. 호를 풍월정이라 지은 것도 그 생활과 맞습니다. 왕위 계승의 첫머리에 있던 사람이, 정치의 길 대신 시문과 정자로 옮긴 기록입니다.
우면동 태실은 그가 태어날 때 봉안된 자리입니다. 태실도감의 격식으로 만든 태봉은, 왕실 맏아들의 탄생을 묻은 터입니다. 사패지와 원림의 규모는 도시화로 줄었습니다. 산 정상의 봉안 공간과 석물 일부는 남아 있습니다. 지정 묘역으로 관리됩니다.
연도를 다시 두면, 1454년 출생, 1460년 월산군, 1468년 현록대부, 예종 사후 왕위는 동생 성종에게, 1471년 월산대군과 좌리공신 2등, 1488년 사망입니다. 양화도 북쪽 희우정은 망원정이 되었습니다. 태가 있는 주소는 우면동 291-1 태봉산 정상입니다.
이정은 추존 덕종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친형입니다. 자 자미, 호 풍월정. 적통으로 보면 왕위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죽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할아버지 세조가 궁궐에서 키웁니다. 7세인 1460년 세조 6년에 월산군에 봉해집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던 해, 동생 잘산군과 함께 현록대부가 됩니다. 종친 관직의 으뜸이었습니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죽자 맏형인 월산군이 계승 후보였으나, 왕실 어른들의 결정으로 왕위는 잘산군에게 갑니다. 그가 성종입니다. 1471년 성종 2년, 이정은 월산대군이 되고 같은 해 3월 좌리공신 2등에 올라 전지와 노비를 받습니다.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로였습니다.
그 뒤의 삶은 서호 양화도 북쪽 언덕에 있습니다. 희우정을 고쳐 망원정이라 부르고, 서적을 쌓아 강물을 보며 시문을 읊었습니다. 호 풍월정과 어울리는 생활이었습니다. 왕위가 동생에게 간 뒤, 권력 대신 정자와 글을 택한 기록으로 남습니다.
태실도감은 왕가의 출산 때 임시로 두던 관청입니다. 태를 명당에 묻고 태봉을 만드는 일은 국운과 왕실의 안녕을 비는 의식이었습니다. 우면동 291-1 태봉산 정상의 태실은 이정이 태어날 때 봉안된 자리이고, 지정 묘역으로 관리됩니다. 사패지와 원림은 도시화로 줄었고, 봉안 공간과 석물 일부는 남아 있습니다. 산꼭대기의 태가 왕의 태가 아닌 이유는, 예종 뒤를 이은 이가 맏형 월산군이 아니라 동생 성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태봉산 정상은 지정 묘역입니다. 주변이 도시로 바뀌면서 사패지와 원림은 예보다 줄었고, 봉안 공간과 석물은 일부 남아 있습니다. 왕이 되지 못한 맏형의 태가 여기 있는 이유는, 예종 뒤를 이을 후보였던 월산군 대신 동생이 성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의 삶은 1471년의 작위·공신과, 희우정을 고친 망원정의 시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1454년부터 1488년까지의 삶, 1460년의 월산군, 1468년의 현록대부, 1471년의 월산대군과 좌리공신 2등. 태봉산 정상에 남은 것은 그 맏아들의 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