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7년 당나라 학사의 망명, 1428년 구로 고척동에 남다

조선 전기 호조참판 여계와 부인 청송 심씨의 묘역

신라로 귀화한 당나라 한림학사의 후손 여계가 세상을 떠난 지 7년 뒤인 1428년, 서울 구로구 고척동에 가문의 묘소가 자리 잡았습니다.
여계묘역 담장
여계묘역 담장
출처: 본 저작물은 '국가유산청'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여계묘역_담장 (촬영년도 : 2015년)'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유산청, www.kh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

서울 구로구 고척동의 주택가 한가운데에는 1025㎡ 규모의 조선 시대 묘역이 자리해 있습니다. 이 터는 1428년(세종 10년)에 조성된 함양 여씨 선조의 묘소입니다. 구로구 고척동 아파트 단지 사이에 600년 넘는 세월 동안 이 묘역이 온전히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문의 긴 역사와 기록이 있습니다.

함양 여씨 가문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계기는 877년(신라 헌강왕 3년)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당나라 내주 사람이자 한림학사를 지낸 여어매가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로 귀화했습니다. 그는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에 정착했고, 고려 시대에 공조전서를 지내며 가문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활동한 여칭(1351~1423)은 병조판서를 역임했습니다. 여칭의 아들이 바로 이 묘역의 주인인 여계입니다. 여계는 조선 태종 대에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좌랑과 호조참판을 지냈습니다. 그는 정승 심백덕의 손녀이자 판사 심의구의 딸인 청송 심씨와 혼인했습니다.

여계는 세종 3년인 142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428년(세종 10년), 지금의 구로구 고척2동 터에 여계의 묘소가 마련되었습니다. 묘역은 위쪽에 여계의 묘를 두고, 그 아래쪽에 부인 청송 심씨의 묘를 배치한 상하 분묘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묘역 입구와 봉분 주변에는 조선 전기의 석물 양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묘를 지키기 위해 돌로 문관과 무관의 형상을 깎아 세운 문·무관석 2기가 봉분 앞을 지킵니다. 묘비 1개와 상석 2기, 지석과 기단석 역시 15세기 초기 조선 분묘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당나라 학사의 귀화에서 시작된 가문의 기록은, 조선 초기 관료의 삶을 거쳐 고척동의 석물과 봉분이라는 구체적인 흔적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

지금

구로구 고척2동에 위치한 여계묘역은 총 면적 1025㎡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위아래로 늘어선 2기의 봉분과 문·무관석, 묘비, 상석 등이 옛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주택가 사이에 위치하여 조선 전기 묘제 연구의 중요한 실물 자료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여계묘역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조선 태종 대에 호조참판 등을 지내고 1421년 사망한 여계(숭의랑공)와 그의 부인 청송 심씨의 묘입니다.
함양 여씨 가문은 언제 한반도에 정착했나요?
877년(신라 헌강왕 3년) 당나라 한림학사 여어매가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로 귀화하면서 정착했습니다.
묘역 내부에는 어떤 석물들이 남아 있나요?
봉분 2기 외에 묘비 1개, 상석 2기, 문·무관석 2기, 지석, 기단석 등이 남아 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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