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당

대한민국온전히 남음

「박인당(博印堂)」은 1978년 석제(石齋) 박호영(朴浩榮)이 종로구에 개업하여 43년 동안 운영되고 있는 인장포(印章?)이다. 박인당의 명칭은 ‘넓을 박(博)’에 ‘도장 인(印)’자를 써서 ‘도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박인당의 창업자 박호영은 1·4후퇴 당시 가족들과 함께 거제도로 피란을 갔다가 먹고 살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가져다가 쇠톱으로 잘라 피난민들에게 도장을 파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외가 친척이 거제도를 찾아왔다가 도장을 파고 있는 박 명장의 손재주를 보고 서울로 올라가자고 권유하여 상경하였다. 1954년 서울로 이사한 후 친인척의 소개로 신당동에 위치한 인장업소인 ‘일성당’에 취직하여 낮에는 하청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서예가이자 전각가였던 김두칠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좌서(左書:오른쪽과 왼쪽이 바뀐 글자)’·전서(篆書)·예서(隸書)·초서(草書)등 전통 인장 예술의 기초를 닦았다. 1964년 경험과 기술을 쌓은 그는 ‘일성당’에서 독립해, 을지로5가 방산시장 옆에 위치한 ‘부흥인쇄’의 일부를 세 얻어 책상 하나를 놓고 본격적으로 인장업에 뛰어들었다. 박호영은 2017년 10월 1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실 이 일 저 일 많은 일을 해 봤지만 인장업이 적성에 딱 맞았고, 이 일에만 집중하면 먹고사는 데 문제는 없겠구나 싶어 죽어라 하고 매달렸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하였다. 1972년 종각역 인근에 ‘예문인쇄’를 개업하였다가 체납으로 폐업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78년 청계천 인근 관철동의 한 건물에 사무실을 얻어 처음으로 ‘박인당’이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이후 인장공예기능사, 인장공예산업기사 등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하고, 옛 서화가와 문인학자들의 날인된 인장을 모은 문헌이나 자료를 보고 서법과 도법을 꾸준히 연구하며 인장업에 몰두한 결과, 2004년 인장공예로 최고기능인 ‘명장(名匠)’ 칭호를 수여 받았다. ‘명장’은 산업현장에 20년 이상 장기 종사하면서 그 분야 최고 수준의 기능을 보유한 기능인을 대상으로 지방자치단체 추천과 심사위원회 심사 등을 거쳐 선정하는 칭호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기계가 보급되어 언제 어디서나 값싸게 도장을 만들고 서명거래가 일반화되어 도장이 이전과 같이 많이 이용되지는 않는다. 2013년 6월 24일 게재된 ‘박인당’이라는 제목의 「대한민국 명장」 유튜브에서 박호영 명장은 한 개인의 인격과 운명이 도장에 담겨 있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도 수작업으로 도장을 만들고 있다는 철학을 밝히기도 하였다. “한자나 한글이나 글자에 따라서 모양이 나는 체가 있고 안 나는 체가 있거든요. 그것은 일단 이름을 봐야 서체가 나와요. 수작업으로 한 것은 위조를 못해요.” 2011년에는 재개발 문제로 종각역 인근에서만 여러 번 이전을 하다가 지금 사무실로 오게 되었다. 여러 번 이전을 하면서도 종로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옛날부터 찾아오는 단골손님들 때문이라고 한다. 개업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박인당에는 단골손님이 찾아오고 있다. 고객 연령대의 성비는 따로 없지만 최근에는 젊은 사람이 운영하는 1인 사업체가 늘어나면서 젊은 층이 더 많이 찾아오기도 한다. 고객이 도장을 받고 ‘참 마음에 든다’고 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박호영 명장의 ‘박인당’. 인장공예기능사로 서예의 전통예술미를 도장에 새겨 시민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서울미래유산이다.

서울미래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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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처의 다른 기억

위도 37.5690245373078 · 경도 126.9838385148

출처: 서울미래유산(서울특별시) 인증 2020-004, futureheritage.seoul.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