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려 지은 절, 지금은 호텔이 됐다

박문사 터 · 장충단에서 신라호텔까지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려고 세운 절이 있었습니다.

이야기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는 원래 다른 이름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1900년, 고종은 을미사변 때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장충단이라는 제단을 세웠습니다. 명성황후 시해라는 국가적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추모의 공간은 나라가 국권을 잃으면서 성격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을 공원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추모의 격식은 사라지고, 산책하는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재편된 것입니다.

그리고 1932년, 이토 히로부미 23주기에 맞춰 총독부는 장충단공원 동쪽에 그를 추모하는 사찰 하나를 세웁니다. 이름은 박문사(博文寺).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 '히로부미(博文)'에서 그대로 따온 절이었습니다. 을미사변 희생자를 기리던 바로 그 자리 옆에, 조선 침탈을 상징하는 인물을 기리는 절이 들어선 셈입니다. 저는 이 배치를 처음 알았을 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자리 선정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문사는 격식을 갖추기 위해 조선 왕실의 상징물까지 끌어다 썼습니다.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통째로 이곳으로 옮겨와 절의 산문(절 입구 문)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미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지으며 제 기능을 잃었던 흥화문이었지만, 왕이 드나들던 궁궐의 정문이 이번엔 총독을 위한 추모 시설의 대문으로 다시 쓰이게 된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절도 나라가 해방을 맞으며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1946년에 철거됐다는 기록과, 정부 수립 이후 철거됐다는 기록이 함께 전해지는데, 정확한 시점이 무엇이든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헐렸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절이 사라진 그 자리엔 1967년 국빈들을 맞이하는 영빈관이 들어섰습니다. 1973년 삼성에 매각되며 지금의 신라호텔이 됐고, 옛 영빈관 건물은 호텔 안에 그대로 남아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박문사의 산문으로 옮겨졌던 흥화문은 그 뒤로도 한동안 영빈관과 신라호텔의 정문 노릇을 하다가, 1988년 서울시의 경희궁 복원 사업에 따라 지금의 경희궁 자리로 다시 옮겨졌습니다. 다만 원래 있던 정확한 위치는 지금도 찾기 어렵습니다. 을미사변의 희생을 기리던 제단이 침탈의 상징을 추모하는 절로, 다시 국빈과 여행객을 맞는 호텔로 — 같은 땅 위에서 세 번이나 얼굴을 바꾸는 동안, 정작 그 정문이었던 흥화문만 궁궐로 돌아간 셈입니다. 장충단공원을 걷다 신라호텔 앞을 지나신다면, 이 땅이 품고 있는 뒤바뀐 기억들을 한 번쯤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자주 묻는 질문

박문사는 왜 지어졌나요?
1932년 조선총독부가 이토 히로부미 23주기에 맞춰 그를 추모하려고 지은 사찰입니다.
박문사 자리는 원래 무엇이었나요?
을미사변 희생자를 추모하려 1900년 고종이 세운 장충단이었으나, 1919년 총독부가 공원으로 바꿨습니다.
박문사 터는 지금 무엇이 됐나요?
1967년 영빈관이 들어섰고, 1973년 삼성에 매각돼 지금의 신라호텔이 됐습니다.

출처

위키백과「박문사」, 나무위키「박문사」, 한겨레「[유레카] 신라호텔 영빈관」, 뉴스포스트「장충단의 굴곡진 역사」

지도에서 보기 유적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