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봉은사 마당에 서면 기와 지붕 아래 선방이 있습니다. 대중들이 참선하는 집이죠. 그 건물의 나이는 절의 나이와 같지 않습니다. 이 자리는 본래 심검당이 있던 터입니다. 1939년 화재가 났고, 목조 구조에 붙은 불로 건물이 전소됐습니다. 수행하던 공간을 빈터로 남길 수 없어, 절은 2년 뒤인 1941년 같은 자리에 선불당을 중건했죠. 오늘 마당에 남은 형태가 그 1941년 건물입니다.
이름만 들으면 1941년에 붙인 선방 이름처럼 보입니다. 쓰임은 참선 선방이 맞습니다. 그러나 ‘선불당’이라는 석 자는 중건보다 앞에서 이미 이 터에 붙어 있었습니다.
절 이름부터 올려야 그 석 자가 보입니다. 고려 때 이곳은 견성사였습니다. 연산군 4년, 서기 1498년입니다. 정현왕후가 성종 선릉의 원찰로 견성사를 크게 중창했습니다. 그때 절 이름을 고친 사람도 정현왕후입니다. ‘은혜를 봉양한다’는 뜻으로 봉은사라 부르게 했습니다.
봉은사는 그 뒤 조선의 큰 절 가운데 하나로 꼽혔습니다. 불교 교단을 이끄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명종 7년, 이 절에서 승과가 실시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승과는 스님이 되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국가 시험입니다. 스님을 선발하는 시험을 치른 장소라는 뜻에서, ‘부처를 뽑는 집’이라는 선불당이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전합니다. 1941년 중건 때 새로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그 사이 건물은 한 번만 타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으로 여러 차례 불이 났고, 그때마다 다시 지어 올리고 고쳤습니다. 중건과 중수가 반복됐습니다. 1939년 화재는 그 줄의 끝, 일제강점기 끝자락의 전소입니다. 1941년 중건은 그 터를 다시 참선하는 선방으로 쓴 일입니다. 옛 선방의 평면을 그때 이 규모로 다시 짜 올렸습니다.
겉에서 센 칸과 안에서 센 칸이 다릅니다. 밖에서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단층 목조 기와집입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실체 구조는 정면 5칸입니다. 한가운데에 동서 4칸, 남북 3칸에 이르는 큰 대방이 있습니다. 내부 삼면은 여러 개의 방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스님과 대중이 한데 모여 정진하고 참선하는 평면입니다. 천장과 뒷면은 훗날 수리되면서 조금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이 양식과 내부 규모를 서울 시내에서 이만큼 유지한 목조 건물은 드뭅니다.
1498년 정현왕후의 중창으로 봉은사가 된 절, 명종 대에 승과가 열린 터, 1939년의 전소, 1941년의 중건. 네 시점이 한 지붕 아래에 있습니다.
지금
강남 한복판, 빌딩 사이에 1941년에 다시 세운 팔작지붕 건물이 있습니다. 쓰임은 여전히 선방입니다. 대중들이 참선하고 마음을 모으는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겉은 정면 8칸, 속은 정면 5칸. 대방을 방이 둘러싼 평면은 중건 때 참선에 맞춘 구조 그대로입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면, 선불당이라는 이름은 1941년에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명종 7년 봉은사에서 승과를 치른 기록에서 온 이름입니다. 스님이 되는 시험, 부처를 뽑는 집. 지금 서는 나무는 1939년 화재 뒤 1941년에 다시 세운 것이고, 석 자는 그 시험이 열리던 터의 이름입니다.
한 줄로 다시 적으면 이렇습니다. 고려의 견성사를 1498년 정현왕후가 성종 선릉의 원찰로 중창하며 봉은사라 불렀습니다. 명종 7년 그 절에서 스님이 되는 국가 시험, 승과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선불당이라는 이름이 전합니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마다 건물은 타고 중건·중수됐습니다. 일제강점기 끝자락인 1939년, 심검당이 있던 터가 다시 전소됐고, 2년 뒤 1941년에 참선 선방으로 중건된 것이 오늘 건물입니다. 정면 8칸·측면 3칸의 팔작지붕, 내부 정면 5칸, 동서 4칸·남북 3칸의 대방. 천장과 뒷면은 나중에 수리됐지만, 서울 시내에서 이 평면을 유지한 목조 선방입니다. 강남 봉은사 마당에서 대중들이 참선하는 쓰임은, 1941년 중건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불당은 그 시험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