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원형 흙무덤 세 기가 동서로 나란합니다. 오래전부터 삼릉이라 불렸습니다. 전승은 신라 박씨 왕들의 무덤이라는 쪽입니다. 아래에서부터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혁거세의 후손으로, 박씨 왕조의 세 임금이 한 언덕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달라왕은 신라 초기의 왕입니다. 신덕왕과 경명왕은 신라 말기의 왕입니다. 8대와 53·54대 사이는 700여 년입니다. 그 시차를 두고 선조와 후손이 한 언덕에 나란히 묻혔다는 전승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고고학 쪽도 어긋납니다. 아달라왕 재위 무렵에는 흙을 높이 쌓은 대형 원형 무덤 자체가 없었습니다.
왜 이 터가 박씨 세 왕의 무덤으로 전해졌는지는 확정 기록이 없습니다. 신라 말, 석씨와 김씨에게 가 있던 왕위를 다시 찾은 박씨 왕가가 정통성을 기리려고 조성했거나, 후대에 전승이 굳었을 가능성은 말해집니다. 누구의 무덤인지를 사료로 닫지는 못합니다. 남산 기슭에 박씨 왕의 이름이 전승으로 붙은 자리입니다.

내부를 연 것은 도굴이었습니다. 가운데, 신덕왕릉이라 전하는 무덤이 1953년과 1963년 두 번 도굴당했습니다. 수습 조사에서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확인됩니다. 돌을 쌓아 방을 만들고, 밖으로 길을 낸 구조입니다.
동벽과 서벽 일부에 색이 남아 있었습니다. 무덤 안에 12폭 병풍을 돌려 세운 것처럼 칠해져 있었습니다. 색은 다섯, 붉은색·황색·백색·군청색·감청색입니다.
경주의 신라 대형 고분은 고구려 고분과 달리 벽화가 없는 쪽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번 색칠은 인물이나 풍속을 그린 벽화는 아니었습니다. 다섯 색으로 병풍 형태를 낸 흔적이고, 경주 지역 신라 무덤에서 처음 확인된 색채 자료입니다.
2011년 7월 28일, 배리삼릉이던 고시 이름이 경주 배동 삼릉으로 바뀝니다.
세 기가 정말 그 세 왕의 무덤인지는, 700년과 봉토분의 시기가 답을 막습니다. 전승은 아달라·신덕·경명입니다. 확정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에는 이런 대형 봉토분이 없습니다. 가운데 무덤이 남긴 확인은 따로입니다. 1953년과 1963년 도굴 뒤의 조사가 굴식돌방과 다섯 색, 12폭 병풍 형태를 경주 신라 무덤에서 처음 본 것입니다.
위치는 경주 남산 서쪽 기슭입니다. 무덤은 동서로 놓인 원형 흙무덤 세 기입니다. 오래 삼릉이라 불렸고, 2011년 7월 28일 고시 이름은 경주 배동 삼릉입니다. 그 전 이름은 배리삼릉입니다.
전승의 주인공은 박씨입니다. 혁거세의 후손이고, 아래에서 위로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입니다. 아달라왕은 신라 초기입니다. 신덕왕과 경명왕은 신라 말입니다. 그 사이가 700여 년입니다. 초기 재위 무렵에는 흙을 높이 쌓은 대형 원형 무덤이 없었습니다. 한 언덕에 세 왕이 모였다는 말을 기록으로 닫을 수도 없습니다. 신라 말 박씨가 석씨·김씨에게서 왕위를 되찾은 뒤 정통성을 기리려 조성했거나, 후대에 전승이 굳었을 가능성은 말해질 뿐입니다.
가운데 무덤, 신덕왕릉이라 전하는 기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됩니다. 조사된 내부는 굴식돌방무덤입니다. 돌을 쌓아 방을 만들고 밖으로 길을 낸 횡혈식석실묘입니다. 동벽과 서벽 일부에 색이 남았습니다. 12폭 병풍을 돌려 세운 듯한 칠입니다. 붉은색·황색·백색·군청색·감청색, 다섯 색입니다. 인물과 풍속을 그린 고구려식 벽화는 아니었습니다. 경주 신라 무덤에서 처음 확인된 색채입니다. 소나무 사이에 그 세 기가 있습니다. 동서로 놓인 원형 봉토 세 기, 남산 서쪽 기슭이 자리입니다.
지금
배동 삼릉은 남산 서쪽 기슭의 소나무 사이에 원형 무덤 세 기로 있습니다. 2011년 7월 28일 이후 공식 이름은 경주 배동 삼릉입니다. 그 전에는 배리삼릉이었습니다.
한 언덕의 세 왕이 사실인지는 여기서 갈립니다. 이름은 8대, 53대, 54대로 전해지고, 사이는 700년이며, 초기에는 대형 봉토분이 없습니다. 가운데 무덤이 확실히 보여 준 것은 도굴 뒤 확인된 굴식돌방과 다섯 색의 병풍 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