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1년의 왕, 왕비가 돌에 남긴 아미타불 기록

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 효양의 창건과 계화부인

799년에 즉위한 신라 제39대 소성왕은 80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위는 1년입니다. 왕비 계화부인은 그 명복을 비는 아미타불과 사적비를 무장사에 남겼습니다.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 및 귀부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 및 귀부
출처: 본 저작물은 '국가유산청'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 및 귀부'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유산청, www.kh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

경주 시가지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암곡리 골짜기에 무장사 옛터가 있습니다.

무장사라는 이름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에게서 시작합니다. 효양은 세상을 떠난 숙부를 추모하려고 이 골짜기에 절을 세웠습니다. 창건의 이유가 추모입니다.

그 절이 왕실의 또 다른 죽음을 담게 된 것은 800년 무렵입니다. 원성왕 다음 왕, 제39대 소성왕은 799년에 즉위했습니다. 80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위 1년입니다.

왕비는 계화부인입니다. 남편 소성왕의 명복을 빌고, 극락왕생을 기원했습니다. 서방 극락의 부처인 아미타불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경위와 남편을 향한 기록을 돌에 남겼습니다. 이름이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입니다.

계화부인이 불상과 비를 둔 곳이 효양이 숙부를 위해 세운 무장사입니다. 숙부를 기린 절터에, 재위 1년 만에 죽은 왕의 명복 기록이 겹칩니다.

비석을 받치는 거북 모양 받침, 귀부의 머리가 두 개입니다. 신라 석조에서 드문 형태입니다. 등 중앙의 사각형 비좌 네 면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간과 방위를 맡는 신입니다.

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출처: 위키백과「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목조 불당은 사라졌고 절터는 잊혔습니다. 1760년, 경주부윤 홍양호가 내동면 암곡리에서 이 비를 찾았습니다. 곧 다시 자취가 없어졌습니다. 1817년, 추사 김정희가 비석 파편 2개를 찾았습니다. 1915년에 파편 1개가 더 나왔습니다. 그제야 이 숲속 터가 무장사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명문이 있는 파편 세 조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비석이 서 있던 암곡리 현장에는 머리 둘 달린 귀부와 머릿돌 이수가 있습니다. 2008년 인근 계곡에서 수습한 석재와 명문을 바탕으로 2011년 복원한 비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사람을 연도로 다시 적으면 둘로 갈립니다. 먼저 효양입니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입니다. 세상을 떠난 숙부를 추모하려고 암곡리 골짜기에 무장사를 세웠습니다. 절의 시작이 왕실의 장례 추모입니다. 경주 시가지에서 동쪽으로 들어간 그 골짜기가 창건의 자리입니다.

다음은 소성왕과 계화부인입니다. 소성왕은 제39대입니다. 799년에 즉위했습니다. 80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위는 1년입니다. 국정을 길게 펼친 기록이 이 비의 주제는 아닙니다. 주제는 남겨진 왕비입니다. 계화부인은 남편의 명복을 빌고 극락왕생을 기원했습니다. 서방 극락의 부처인 아미타불상을 만들었습니다. 만드는 경위와 남편을 향한 기록을 돌에 남겼습니다. 그 돌의 이름이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입니다. 세운 장소는 새 절이 아닙니다. 효양이 숙부를 위해 연 무장사입니다.

귀부를 보면 정성이 형태로 남습니다. 거북 받침의 머리가 두 개입니다. 신라 석조에서 드문 모습입니다. 등 중앙의 사각형 비좌, 그 네 면에 십이지신상이 있습니다. 시간과 방위를 맡는 신을 비석이 꽂히는 자리에 새긴 것입니다.

절의 목조 건물은 사라졌습니다. 비도 한동안 묻혔습니다. 1760년, 경주부윤 홍양호가 내동면 암곡리에서 비를 찾았습니다. 곧 다시 없어졌습니다. 1817년, 추사 김정희가 파편 2개를 찾았습니다. 1915년에 파편 1개가 더 나왔습니다. 세 조각이 모인 뒤에야 이 터가 무장사로 확인되었습니다. 글이 있는 세 조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암곡리에는 두 머리 귀부, 이수, 2008년 수습한 계곡 석재와 명문으로 2011년 복원한 비가 있습니다. 원본 명문과 터의 받침이 이렇게 나뉩니다.

지금

박물관의 세 조각과 절터의 귀부가 나뉘어 있습니다. 글이 새겨진 원본 파편은 국립중앙박물관입니다. 암곡리에는 두 머리 귀부, 이수, 2011년 복원 비가 있습니다.

재위 1년 만에 죽은 소성왕을 위해 계화부인이 남긴 것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입니다. 절을 처음 연 사람은 왕비가 아닙니다.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이 숙부를 추모해 무장사를 세웠고, 계화부인은 그 터에 남편의 명복 기록을 올렸습니다. 비가 다시 이름을 되찾은 것은 1760년 홍양호의 발견, 1817년 김정희의 파편 둘, 1915년의 마지막 조각 순서입니다. 재위 1년의 왕을 위한 글은 박물관의 세 조각과, 현장 귀부 비좌의 십이지신에 남아 있습니다. 효양의 창건과 계화부인의 비가 한 절터에 겹칩니다.

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귀부
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귀부
출처: 위키백과「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자주 묻는 질문

무장사는 누가 세웠나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이 숙부를 추모하려고 창건했습니다.
계화부인은 왜 아미타불과 비를 세웠나요?
799년에 즉위해 800년에 세상을 떠난 남편 소성왕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빌려고 아미타불을 만들고, 그 경위를 사적비에 적었습니다.
현장과 박물관에는 무엇이 있나요?
암곡리에는 머리가 둘인 귀부, 이수, 2008년 수습한 석재와 명문으로 2011년 복원한 비가 있습니다. 명문 파편 세 조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비는 어떻게 다시 알려졌나요?
1760년 경주부윤 홍양호가 암곡리에서 찾았으나 다시 사라졌고, 1817년 김정희가 파편 2개, 1915년에 파편 1개가 더 나와 무장사로 확인되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오픈API, 위키백과「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지도에서 보기 유적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