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시굴이 연 곳, 기와와 숯이 한자리에서 나왔다

경주 손곡동과 물천리 유적 · 채토장에서 가마까지 한 구역에 모인 통일신라 요업

1994년 지표조사 이듬해, 시굴은 시골 가마터로만 전하던 야산에서 수십 기의 가마를 확인했습니다.
기와가마터
기와가마터
출처: 본 저작물은 '국가유산청'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기와가마터'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유산청, www.kh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

손곡동과 물천리 야산에는, 궁궐 지붕의 기와와 살림의 토기, 가마에 넣을 숯이 어디서 나왔는지 묻는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한 구역에 모인 공정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이 자리는 가마 몇 기가 흩어진 수준을 넘습니다. 원료인 흙을 파내던 채토장, 흙을 다듬고 모양을 만들던 공방지, 제품을 구워내던 가마, 일하던 이들이 머물던 건물지, 생산 도구가 한 구역에 있습니다. 요업의 전체 공정이 모인 통일신라의 국가적 요업 생산 단지로 정리됩니다.

입지에는 세 조건이 겹칩니다. 토기와 기와에 맞는 흙이 있어야 하고, 가마의 불길을 유지할 땔감과 숯을 구하기 쉬운 산자락이어야 하며, 만든 물건을 도성 쪽으로 나를 수로와 도로가 가까워야 합니다. 손곡동과 물천리는 그 조건이 모인 자리로 전합니다.

동선은 채취에서 구워 내기까지 이어집니다. 채토장에서 흙을 파고, 수비 과정으로 불순물을 거른 뒤, 옆 공방에서 기와와 토기로 성형합니다. 잘 말린 기물은 비탈면에 조성된 가마로 옮겨, 수백 도가 넘는 고온에서 굽습니다. 가마에 불을 때울 숯도 멀리서 가져오지 않고 현장에서 구워 공급했습니다. 토기가마, 기와가마, 숯가마가 한자리에 있는 이유입니다.

이름이 남지 않은 일터

역사서와 금석문에는 이 가마를 관리하던 관료의 이름도, 불 앞에서 기와를 굽던 장인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발굴에서 드러난 생산 도구, 가마 바닥에 눌러붙은 흙, 구석에 흩어진 토기 조각이 문헌 밖의 일터를 보여 줍니다. 이름은 없어도, 그들이 만든 기와와 토기는 통일신라 도성의 지붕과 살림을 채운 물건으로 남습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오래도록 가마터가 모여 있는 곳으로만 구전되었습니다. 옛날에 토기를 굽던 시골 가마라는 정도였습니다. 1994년 지표조사가 실시되고, 1995년 시굴조사가 시작되면서 땅속의 규모가 확인됩니다. 수십 기에 달하는 토기가마와 기와가마, 숯가마가 집단으로 있었고, 원료 채취장과 작업장, 건물지가 함께 남아 있었습니다. 시굴에서는 대규모 가마와 공방지, 고분도 확인되었습니다. 국내 발굴사상 최대 규모의 토기 및 숯 관련 생산 유적으로 정리된 자리입니다.

그 전까지 고대 요업 연구는 완성된 유물이나, 단편적인 가마터 한두 곳을 통해 공정을 추정하는 데 머물렀습니다. 손곡동과 물천리에서는 흙을 떠서 제품을 내기까지의 공정을 한 자리에서 복원할 자료가 나왔습니다. 채토, 수비, 성형, 건조, 소성, 현장의 숯이 한 구역의 시설로 대응합니다.

조사 연도와 시설을 다시 맞추면

1994년의 지표조사는 지표면의 단서였습니다. 이듬해 1995년 시굴이 땅속의 규모를 열었습니다. 나온 가마는 토기가마, 기와가마, 숯가마이고, 그 수가 수십 기입니다. 가마 옆에 원료 채취장, 작업장, 공방지, 건물지, 생산 도구, 고분이 함께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국내 발굴사상 최대 규모의 토기 및 숯 관련 생산 유적이라는 정리가 붙습니다. 기와까지 포함한 생산 유적으로도 같은 발굴이 설명됩니다.

공정은 시설의 순서로 읽힙니다. 채토장에서 토기와 기와에 맞는 흙을 팝니다. 수비로 불순물을 거릅니다. 옆 공방에서 성형합니다. 말린 기물을 비탈면 가마로 옮겨 수백 도가 넘는 고온에 굽습니다. 불을 때울 숯은 같은 현장에서 구워 가마에 넣습니다. 멀리서 숯을 날라 오던 구조로 적히지 않습니다. 흙, 산자락의 땔감, 도성으로 나가는 수로와 도로가 이 입지에 겹친다고 전하는 이유입니다.

사람 이름은 비어 있습니다. 가마를 관리하던 관료, 기와를 굽던 장인은 역사서와 금석문에 없습니다. 남은 것은 소박한 생산 도구, 가마 바닥에 누렇게 눌러붙은 흙, 구석의 토기 조각입니다. 주민 구전은 오랫동안 ‘가마터가 집단으로 남아 있는 곳’, ‘옛날 토기를 굽던 시골 가마’에 머물렀습니다. 1995년 시굴이 그 구전을, 통일신라 요업의 전체 공정을 복원할 수 있는 단지의 증거로 바꿉니다.

불국사의 석탑과 황남대총의 금관은 도성에서 보이던 완성품입니다. 그 지붕의 기와, 살림의 토기, 가마의 숯이 공급되던 쪽을 시설로 보여 주는 자리가 손곡동과 물천리입니다.

지금

손곡동과 물천리 유적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자리는 보문호 동쪽 산자락입니다. 가마의 불도 숯을 태우던 연기도 없고, 발굴로 확인된 기와가마터와 공방의 터만 남아 있습니다.

1994년의 지표와 1995년의 시굴이 연 것은, 불국사의 석탑이나 황남대총의 금관을 먼저 떠올리던 경주 옆에 놓이던 질문의 답이었습니다. 도성의 기와와 토기, 가마의 숯은 손곡동·물천리의 채토장과 공방, 토기·기와·숯가마에서 공급되던 물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경주 손곡동과 물천리 유적은 언제 본격적으로 발굴되었나요?
1994년 지표조사를 거쳐 1995년 시굴조사에서 대규모 가마와 공방지, 고분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이곳이 국내 발굴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국내 발굴사상 최대 규모의 토기·숯·기와 관련 생산 유적으로, 채토장부터 공방, 가마, 건물지까지 남아 고대 요업의 전체 공정을 복원할 전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설이 확인되었나요?
토기·기와가마와 숯가마, 흙을 파던 채토장, 성형과 가공을 하던 공방지, 작업 관련 건물지와 생산 도구가 확인되었습니다.

같이 보면

  • 경주 불국사 · 지도 · 글 경주에서 먼저 떠올리기 쉬운 통일신라 사찰. 그 석탑의 재료가 된 생산 기지와 짝을 이룹니다.
  • 황남대총 · 지도 금관이 나온 왕릉. 도성의 완성품 옆에, 기와와 토기를 굽던 유적이 있습니다.

출처

국가유산청 오픈API

지도에서 보기 유적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