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강동구 암사동, 한강변. 건너편으로는 아차산성이 있습니다. 이 흙 아래에 살던 사람의 이름은 왜 한 자도 없을까요.
방사성탄소측정 결과, 이 터의 신석기 삶은 기원전 4,000년에서 3,000년기입니다. 발굴된 문화층은 3개입니다. 한 계절 머물다 떠난 자리가 아닙니다. 오랜 기간 같은 강변이 터전으로 쓰였습니다.
한강은 물을 대 주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어로에도 맞았습니다. 강가의 토양과 인근 언덕의 산림은 채집과 수렵에 쓰였습니다. 마을이 선 이유로 기록에 남은 조건은 이것입니다.
5~6미터 움집, 스무 채
확인된 집터는 20여 기입니다. 딸린 시설과 돌무지시설도 같이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 유적 가운데, 단일 마을 단위로는 최대 규모입니다.
집은 움집입니다. 바닥을 땅속으로 팠습니다. 평면은 둥글거나, 모서리를 죽인 네모꼴입니다. 한 변 또는 지름은 5미터에서 6미터입니다. 깊이는 70센티미터에서 100센티미터입니다.
한가운데에는 돌을 두른 화덕자리가 있습니다. 입구는 남쪽을 향합니다. 네 모서리 부근에는 기둥 구멍이 보통 4개씩 남아 있습니다. 그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구조입니다.

토기, 그물추, 탄 도토리
유물의 중심은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입니다. 강가 바닥에 꽂아 쓰게 만든 그릇입니다. 저장과 조리에 쓰였습니다.
돌도끼도 나왔습니다. 나무를 다듬고 땅을 다루는 도구로 봅니다. 그물추는 그물 아래에 달아 한강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로를 보여 줍니다.
불에 탄 도토리도 있습니다. 채집해 둔 열매가 탄화되어 남은 것입니다. 그물추는 강의 물고기, 도토리와 돌도끼는 숲의 열매와 도구를 가리킵니다.
이 마을은 한강 물결과 세월 속에 묻혔습니다. 선사시대라 권력자의 이름도, 노래의 가사도 문헌에 없습니다. 발굴로 다시 열렸을 때 지상 구조물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땅속의 집터와 토기 조각이 남았습니다.
2011년 7월 28일 관보 고시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암사동선사주거지’에서 ‘서울 암사동 유적’이 되었습니다. 한강 유역 신석기 문화의 핵심 터전이고, 확인된 신석기 유적 중 최대 마을 단위라는 가치가 그 변경의 이유입니다.
지금
한강변에 유적지와 전시관이 있습니다. 집터가 원형 그대로 지상에 남아 있던 것은 아닙니다. 발굴에서 확인된 20여 기의 구조, 기둥 구멍, 남쪽 입구, 화덕자리를 바탕으로 마을 모습을 복원해 두었습니다.

전시관에는 주거지가 노출된 상태와 함께 빗살무늬 토기, 돌도끼, 그물추, 탄화된 도토리가 있습니다.
이름의 빈칸은 그대로입니다. 대신 숫자가 있습니다. 문화층 3개, 집터 20여 기, 바닥 지름 5~6미터, 깊이 70~100센티미터, 화덕 하나, 기둥 구멍 넷, 입구는 남쪽.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와 탄 도토리가 그 집의 살림입니다. 문헌에 이름이 없는 이유는, 이 터가 신석기 마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