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듬해, 창살 안의 사람이 바뀌다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 1946년 경성형무소에서 1988년 사적까지

1944년 이 형무소의 수용 인원은 2,890명이었습니다. 1946년, 갇히는 사람의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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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독립문 인근, 인왕산 기슭의 붉은 벽돌. 광복 직후 이 담장 안에는 누가 들어왔을까요.

1907년, 일제가 침략을 본격화하던 때 일본인 설계로 근대 감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약 500명을 수용하는 560여 평의 목조건물이었고, 이름은 경성감옥이었습니다. 종로에 있던 감옥의 수용자를 이곳으로 옮겨 가두었습니다.

1912년, 마포구 공덕동에 새 감옥이 생기자 이곳은 서대문감옥이 되었고, 1923년에는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일제 말기인 1944년, 수용 인원은 2,890명이었습니다. 18세 미만의 소녀, 장기수, 무기수, 애국지사가 갇혀 있었습니다.

1946년의 수용자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왔습니다. 이듬해 1946년, 이름은 경성형무소가 되었다가 서울형무소가 되었습니다. 이름보다 큰 변화는 갇히는 사람이었습니다.

광복 직후의 해방 정국에서,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사를 가두고 탄압하던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이 이 창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얼마 전까지 헌병과 순사가 독립을 외치던 사람을 끌고 오던 감방에, 일제에 협력하던 사람들이 조사와 재판을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
출처: 위키백과「서대문형무소」

서울구치소와 시국사범

해방 후의 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 1967년에는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대한민국 현대사가 정치적으로 크게 움직이던 시기입니다.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를 거치며, 정권과 사상의 갈등 속에서 시국사범이 다시 이 벽돌 건물로 들어왔습니다. 민주화와 정치적 신념으로 움직이던 사람들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1907년 일제가 벽돌을 쌓을 때 목적은 조선인의 저항을 꺾는 것이었습니다. 해방 뒤에는 친일 세력을 단죄하는 장소가 되었고, 이어서 시국사범의 수감처가 되었습니다.

일제의 강점, 해방 정국의 반민족행위자 단죄, 독재와 민주화가 맞선 시국사범의 수감이 한 터에 겹칩니다. 1988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구치소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기념 공간으로 남았습니다.

지금

인왕산 자락에 붉은 벽돌 담장과 감시탑이 있습니다. 1988년 사적 지정 이후, 형벌 시설이 아니라 지난 시간을 보는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열려 있습니다.

광복 직후 담장 안에 들어온 사람은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이었습니다. 1946년의 경성형무소·서울형무소가 그 전환입니다.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에서는 4·19와 5·16을 거친 시국사범이 수감되었습니다. 1988년, 구치소가 이전한 뒤 사적이 되었습니다. 2,890명이던 1944년의 감옥과, 1946년 이후의 수용자는 같은 벽돌 안의 다른 명단입니다.

1907년, 일본인 설계로 인왕산 기슭에 경성감옥이 섰습니다. 약 500명, 560여 평의 목조건물입니다. 종로 감옥의 수용자를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1912년 마포구 공덕동에 새 감옥이 생기면서 이곳은 서대문감옥이 되었고, 1923년 서대문형무소가 되었습니다. 1944년 수용 인원 2,890명 안에는 18세 미만 소녀, 장기수, 무기수, 애국지사가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다음 해, 1946년에 경성형무소와 서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이 조사와 재판을 기다리며 들어왔습니다.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를 거치며 시국사범이 수감되었습니다. 1988년 사적 지정으로 구치소 역할은 끝났고, 붉은 벽돌 담장과 감시탑이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남았습니다.

광복 직후 창살 안에 들어온 사람은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경성형무소와 서울형무소입니다. 뒤의 서울구치소에는 시국사범이 있었습니다.

독립문 인근의 인왕산 기슭입니다. 1907년 경성감옥은 500명 규모, 560여 평 목조로 시작했습니다. 종로 감옥에서 사람을 옮겨 왔습니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4년 2,890명. 그 안에 18세 미만의 소녀와 장기수, 무기수, 애국지사가 있었습니다. 1946년 이후의 이름은 경성형무소와 서울형무소이고, 수용자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이었습니다.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 4·19와 5·16을 지난 시국사범, 1988년 사적. 감시탑과 붉은 벽돌 담장이 그 현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광복 직후 창살 안의 변화는 1946년의 그 명단입니다. 일제가 1907년에 쌓은 감옥이, 해방 뒤에는 반민족행위자 수용과 시국사범 수감으로 이어진 자리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광복 직후 이름과 수용자는 어떻게 바뀌었나요?
1946년 경성형무소, 이어 서울형무소가 되었고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이 수용되었습니다.
그 뒤 명칭은요?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바뀌었습니다.
서울구치소 시절에는 누가 갇혔나요?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 등 정치적 변동 과정에서 시국사범이 수감되었습니다.
사적 지정은 언제인가요?
서울구치소가 이전한 뒤인 1988년입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문화재공간정보, 위키백과 「서대문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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