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서울 안국동 현대건설 사옥 마당 한복판에는 높이 4.2m의 사각형 돌대가 서 있습니다. 빌딩 건물들 사이에 놓인 이 돌 구조물은 조선 시대 하늘과 별을 관측하던 천문대입니다.
궁궐 내부도 아닌 민간 기업 마당에 조선시대 왕립 천문대가 들어서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세종이 광화방에 세운 하늘 길목
1434년(세종 16년) 세종은 천체관측기구인 간의, 소간의, 규표, 해시계, 물시계를 새로 개량하고 발명하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세종은 경복궁 서북쪽에 동양 최대 규모의 대간의대를 세우는 한편, 왕립 중앙관청인 서운관이 있던 한성부 북부 광화방에도 관측대를 조성했습니다. 서운관은 천문, 지리, 기상 측후, 물시계 관리 같은 나라의 시간과 하늘 업무를 관장하던 핵심 기관이었습니다.
세종은 이 광화방 서운관과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소형 천체관측기구인 '소간의'를 올릴 돌대를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소간의를 올려두던 곳이라 해서 '소간의대'라 불렀고, 별을 관측하는 대라는 뜻에서 '첨성대'라고도 불렀습니다.
관천대는 다듬은 돌을 높이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쌓아 올렸습니다. 상단에는 직사각형 돌로 난간을 둘렀습니다.

임진왜란의 화마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유산
1466년(세조 12년) 서운관은 '관상감'으로 관청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관상감이 있던 안국동 고개는 서운관의 이름을 따 '운현(雲峴)'이라 불렸고, 훗날 이 언저리에 들어선 흥선대원군의 저택 운현궁 명칭도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조선의 천문 관측 시설은 결정적 위기를 맞이합니다. 경복궁에 있던 동양 최대 규모의 대간의대가 전쟁 중에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조차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광화방 관상감에 서 있던 소간의대는 파괴를 면했습니다. 경복궁 대간의대와 다른 소간의대들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이 관천대만 조선 전기에 제작된 관천대 중 유일하게 실물로 남았습니다.
비석과 관측대는 남았습니다. 대를 만든 세종과 관상감의 관원들은 떠났고요.

470년의 관측 역사와 현대 사옥의 공존
관상감은 1894년(고종 31년) 관상소로 개편되었고, 1907년에는 현대식 기상 관측을 맡는 측후소로 전환되었습니다. 1434년 세종 대부터 1907년 측후소가 될 때까지 470여 년간 한자리에서 하늘의 변화를 관측해 온 셈입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이 터는 휘문고등학교 교정으로 쓰였으며, 1980년대에 들어 현대건설 사옥이 들어섰습니다. 사옥 건설에 맞춰 1982년 사적 제296호로 지정되었고, 1984년 원래 위치에서 완전 해체 복원 작업을 거쳤습니다.
1984년 해체 복원 조사 당시 중요한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관천대 위 중앙에 십자선이 그어진 관측용 대석의 방위는 353도로, 진북(진짜 북쪽)에서 서쪽으로 7도 기울어진 자북(나침반이 가리키는 북쪽)과 거의 일치했습니다.
조선 전기 관원들이 나침반 정밀도에 맞춰 정확하게 관측대를 배치했음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였습니다.
지금
현재 서울 관상감 관천대는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건설 사옥 본관 앞마당에 서 있습니다.
원래 대 위로 올라가던 돌계단은 없어졌지만, 높이 4.2m의 다듬은 석조 대와 상부 돌 난간은 원래 위치를 지키고 있습니다. 2011년 7월 28일 행정 고시를 통해 문화재 명칭이 '관상감관천대'에서 '서울 관상감 관천대'로 공식 변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