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3.95미터, 조선 신하가 쓴 청 황제의 공덕비

서울 삼전도비 · 1639년, 이경석·오준·여이징

한강가에 높이 3.95m, 폭 1.4m의 비가 서 있습니다.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입니다. 청나라 땅이 아닌 조선의 삼전도 나루터에, 조선의 신하가 이 글을 써야 했던 이유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삼전도비 전경
삼전도비 전경
출처: 본 저작물은 '국가유산청'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삼전도비 전경'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유산청, www.kh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

대청황제공덕비는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적어 세운 승전비입니다. 그 비가 선 곳은 조선의 한강가, 삼전도 나루터입니다. 조선이 오랑캐라 부르던 이들의 황제를 위해, 조선의 신하가 붓을 들어 공덕을 적어야 했던 자리입니다.

조선 전기까지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은 조선에 조공과 특산물을 바치던 이들이었습니다. 조정은 그들을 교화의 대상이자 변방의 부족으로 여겼습니다. 명나라가 내부의 혼란과 국력 약화로 어지러워진 틈에 여진족은 세력을 키웠습니다. 후금을 건국하고, 세력을 넓히며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진족이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면서 관계가 파국으로 갔습니다. 명나라와의 의리와 명분을 지키려던 조선 조정은 청의 군신 관계 요구를 거부했고, 두 나라의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1636년, 인조 14년. 군신 관계 요구를 거절당한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병자호란입니다. 청군이 빠르게 진격하면서 도성은 위기에 놓였고,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했습니다.

식량 부족과 사방을 둘러싼 청군의 압박 속에서 남한산성의 고립은 깊어졌습니다. 성 안에서 저항했으나 구원병은 오지 않았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의 문을 열고 내려왔습니다. 걸어 내려온 곳이 청나라 군대의 진영이 있던 한강가 삼전도 나루터입니다.

서울 삼전도비
서울 삼전도비
출처: 위키백과「서울 삼전도비」

삼전도 나루터에서 인조는 청 태종 앞에 항복을 선언하고 강화협정을 맺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적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은 이 일은 조선의 기록에 지울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청 태종은 항복을 받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자신의 승리와 공덕을 기릴 기념비를 인조가 항복한 바로 그 자리, 삼전도 나루터에 세우라고 조선 조정에 요구했습니다.

적국의 황제를 찬양하는 비문을 직접 지어야 하는 일이 조정에 떨어졌습니다. 그 글을 맡은 사람이 문장가 이경석입니다. 이경석은 청의 강요 속에서 나라의 안위를 위해 칭송의 문장을 썼고, 이 비문을 지은 일은 그의 평생의 짐으로 남았습니다. 이경석이 지은 비문 위에, 서예로 이름난 오준이 글씨를 썼습니다. 비석 맨 위, 제목을 새기는 전액은 여이징이 써서 ‘대청황제공덕비’ 일곱 글자를 적었습니다.

1639년, 인조 17년에 대청황제공덕비, 곧 삼전도비가 삼전도 나루터에 세워졌습니다. 높이 3.95m, 폭 1.4m의 돌은 승자의 공덕을 적은 석비이자, 조선의 왕이 항복한 현장에 조선의 문신과 서예가가 붓으로 만든 패배의 기록입니다.

한때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세운 청, 그 황제의 공덕을 적으라는 요구 앞에서, 인조와 신하들은 한강가 삼전도에 이 비를 세웠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서 조공을 바치던 여진이 후금을 세우고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조선에 신하의 예를 요구했습니다. 조정이 거부하자 1636년 인조 14년, 청 태종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왔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식량이 떨어지고 구원병이 오지 않자 성을 나와, 청군 진영이 있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하고 강화협정을 맺었습니다. 청 태종은 그 자리에 자신의 공덕을 새긴 비를 요구했습니다. 문장가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서예가 오준이 글씨를 쓰고, 여이징이 전액에 대청황제공덕비 일곱 글자를 썼습니다. 1639년 인조 17년, 높이 3.95m 폭 1.4m의 삼전도비가 나루터에 섰습니다. 비의 공식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고, 삼전도비라는 이름은 나루터에서 왔습니다. 승전비이면서, 인조가 무릎을 꿇은 현장의 기록입니다. 이경석에게 그 글은 평생의 짐이었다. 1636년의 항복과 1639년의 건립이 한강가에 이 돌이 선 이유입니다.

지금

삼전도비 앞에는 귀부와 비신이 남아 있습니다. 비면에 새긴 글씨는 이경석이 짓고, 오준이 쓰고, 여이징이 전액을 쓴 1639년의 기록입니다.

굴욕의 역사로 기억되는 비석이고, 그 일을 잊지 않기 위해 남아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한 삼전도 나루터에 청 태종의 요구로 세워진 것이 대청황제공덕비입니다. 높이 3.95m, 폭 1.4m. 이경석의 비문, 오준의 글씨, 여이징의 전액이 돌 위에 남아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삼전도비의 원래 이름은 무엇인가요?
비석 상단 전액에 여이징이 쓴 공식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입니다.
삼전도비는 언제, 왜 세워졌나요?
병자호란(1636년) 때 청나라에 패배하여 인조가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한 후, 청태종의 강요로 그의 공덕을 기록하기 위해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습니다.
삼전도비의 비문과 글씨는 누가 작성했나요?
비문은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전액)은 여이징이 썼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문화재공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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