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춧돌 둘만 남은 문, 이름은 1539년에 바뀌었다

서울 영은문 주초 · 모화루에서 영은문까지, 1896년 철거와 1979년 이전

지붕도 기둥도 없는 돌 두 개가 서 있습니다. 1896년에 헐린 영은문의 주춧돌입니다.
영은문주초
영은문주초
출처: 본 저작물은 '국가유산청'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영은문주초'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유산청, www.kh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

서대문구 도로변 녹지, 독립문 앞쪽에 사각형 밑돌 두 개가 있습니다. 위에는 지붕도, 목재 기둥도 없습니다. 서울 영은문 주초입니다. 영은문(迎恩門)은 황제의 은혜를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1407년 모화루, 1430년 모화관

이 길목의 첫 기록은 태종 7년(1407)입니다.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하려고 한양 도성 서쪽 길목에 모화루(慕華樓)를 세웁니다. 중국의 문화와 정세를 존중하고 사대의 예우를 갖추기 위한 객사 겸 영빈관이었습니다. 세종 12년(1430)에 이름이 모화관(慕華館)으로 바뀌고, 모화관으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홍살문이 섭니다.

서대문 밖 이 길은 명나라 사신이 의주를 거쳐 한양으로 들어올 때 지나던 길목이었습니다. 국왕과 대신들이 나와 사신을 맞이하거나 환송하는 의례가 이 일대에서 열렸습니다.

서울 영은문 주초
서울 영은문 주초
출처: 위키백과「서울 영은문 주초」

1537년 영조문, 1539년 영은문

중종 32년(1537), 홍살문만으로는 사신을 맞는 격식에 부족하다고 보아 문을 새로 짓습니다. 이름은 영조문(迎詔門)입니다. 중국 황제의 칙서를 맞아들인다는 뜻입니다.

2년 뒤인 중종 34년(1539),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이 영조문보다 황제의 은혜를 맞이한다는 뜻의 영은문(迎恩門)이 낫다고 건의합니다. 조정은 그 건의를 받아 이름을 고칩니다. 연주문, 연은문이라고 부른 적도 있습니다.

중종 때 완성된 영은문은 1칸 규모의 정문이었습니다. 기초가 지금 남은 주춧돌 두 개입니다. 2단 사각형 받침 위에 기둥 모양의 긴 석재를 세우고 안상(眼象) 문양을 새겼습니다. 안상은 받침돌에 새기는 무늬입니다.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지붕은 우진각으로 짰습니다. 지붕에는 청기와를 얹고, 마루에는 동물 모양 잡상을 올렸습니다.

그 뒤로 350여 년 동안 영은문은 조선이 중국과 맺은 사대 관계의 표상으로 남습니다. 사신이 올 때 문무백관이 이 문 앞까지 나와 맞이했고, 사신은 이 문을 지나 모화관으로 들어갔습니다.

Yeongeunmun Gate.JPG
Yeongeunmun Gate.JPG
출처: 위키백과「서울 영은문 주초」

1896년에 헐고, 1979년에 옮기다

1890년대에 청나라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조선 안에서는 사대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집니다. 1896년, 사대의 상징이던 영은문을 헐기로 합니다. 청기와와 잡상이 있던 목조 지붕과 기둥은 철거됩니다.

주춧돌 두 개는 헐지 않고 남깁니다. 문이 서 있던 자리 앞쪽에 독립문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사대의 문 받침과 독립문이 한 공간에 놓입니다.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원래 자리에 차도가 나게 되자, 독립문과 함께 서대문독립공원 안으로 약 70미터 옮겨 오늘에 이릅니다. 원래 자리는 지금 성산대로 차도가 지나는 지점입니다.

이름을 다시 세면, 1407년 모화루, 1430년 모화관과 홍살문, 1537년 영조문, 1539년 영은문입니다. 1칸, 주초 2개, 2단 받침, 안상, 우진각, 청기와, 잡상. 1896년에 목조는 없어지고 주초만 남았으며, 1979년에 약 70미터를 옮겼습니다.

태종 7년의 모화루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려고 도성 서쪽 길목에 세운 객사 겸 영빈관이었습니다. 세종 12년에 모화관으로 이름이 바뀌고, 그 앞 길목에 홍살문이 섰습니다. 명나라 사신은 의주를 거쳐 한양으로 들어올 때 이 길을 지났고, 국왕과 대신이 나와 맞이하거나 환송하는 의례가 여기서 열렸습니다.

중종 32년, 홍살문만으로는 격식이 부족하다고 보아 영조문을 새로 짓습니다. 황제의 칙서를 맞아들인다는 이름입니다. 2년 뒤 명나라 사신이 영은문이 낫다고 건의하고, 조정이 그 이름을 받습니다. 연주문·연은문이라는 다른 부름도 있었습니다. 뜻은 황제의 은혜를 맞이하는 문입니다.

문은 1칸이었습니다. 지금 남은 주초가 그 기초입니다. 2단으로 깐 사각형 받침 위에 긴 석재를 세우고 안상 문양을 새겼습니다. 그 위 원기둥, 우진각 지붕, 청기와, 마루의 동물 모양 잡상. 이후 350여 년 동안 사신이 올 때마다 문무백관이 문 앞까지 나왔고, 사신은 이 문을 지나 모화관으로 들어갔습니다.

1890년대에 청의 영향력이 줄고, 조선 안에서는 사대에서 벗어나 자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집니다. 1896년 영은문의 목조 지붕과 기둥을 헐었습니다. 청기와와 잡상은 그때 사라졌다. 주춧돌 두 개만 그 자리에 두고, 문 앞쪽에 독립문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성산대로를 내면서 원래 자리에 차도가 나게 되자, 독립문과 주초를 서대문독립공원 안으로 약 70미터 옮겼습니다. 옛 자리는 지금 성산대로가 지나는 지점입니다. 돌 두 개만 남은 이유는, 1896년에 목조를 일부러 헐고 주초는 남겼기 때문이고, 지금 공원의 위치는 1979년의 이전 때문입니다.

지금

서대문독립공원에서 독립문 곁에 주춧돌 두 개가 있습니다. 2단 사각형 받침의 안상 문양은 남아 있습니다. 원기둥과 청기와 지붕은 1896년에 사라졌습니다. 태종 7년의 모화루에서 중종 34년의 영은문까지 사신을 맞이하던 길목이고, 그 문을 헐고 주초만 둔 채 앞에 독립문을 세운 해가 1896년입니다. 왜 돌 두 개만 남았는지는, 그 철거와 1979년의 이전으로 설명됩니다.

지붕이 없는 이유는 문이 무너져서가 아닙니다. 1896년에 사대 외교의 상징이던 목조 문을 헐면서 주초 둘을 증거로 남겼고, 그 앞쪽에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약 70미터를 옮겨 서대문독립공원에 있는 것은 1979년 성산대로 공사 때문입니다. 1407년 모화루, 1430년 모화관과 홍살문, 1537년 영조문, 1539년 사신의 건의로 바뀐 영은문. 1칸의 우진각 지붕과 청기와·잡상은 1896년에 없어졌고, 2단 받침의 안상만 돌 두 개에 남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영은문은 원래 어떤 용도로 세워진 문이었나요?
조선시대에 명나라 등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이었습니다. 태종 7년(1407) 모화루로 시작해 세종 12년(1430) 모화관으로 바뀌었고, 중종 32년(1537) 영조문을 거쳐 중종 34년(1539) 중국 사신의 건의로 황제의 은혜를 맞이한다는 뜻의 영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왜 영은문은 헐리고 주춧돌만 남아 있나요?
1896년 자주와 독립을 다짐하는 의미로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목조 구조물은 철거되었으나 기둥을 받치던 주초 2개는 남겨 두었습니다.
영은문 주초가 현재 위치로 옮겨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래 자리는 지금의 성산대로 차도가 지나는 지점입니다. 1979년 성산대로 건설로 독립문과 함께 서대문독립공원 안으로 이전되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문화재공간정보, 위키백과「서울 영은문 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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