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동대문구 청량리동. 봉분이 두 개입니다. 먼저 묻힌 쪽은 영휘원, 그 옆은 숭인원입니다.
순헌황귀비 엄씨, 1911년
영휘원은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의 원입니다. 엄씨는 8살에 입궐해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1897년 고종과의 사이에서 황태자(의민황태자, 영친왕)를 낳은 뒤 후궁이 됩니다. 1903년(광무 7) 황귀비로 책봉되어 경선궁에 거처합니다.
여성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와 명신여학교(지금의 숙명여학교)를 설립합니다. 재정난을 겪던 양정의숙에는 땅 200만 평과 내탕금을 기증합니다. 경술국치(1910) 이듬해인 1911년, 덕수궁 즉조당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신주는 덕안궁에 모셨다가 육상궁 경내로 옮겨지고, 유해는 청량리 숲에 영휘원이라는 이름으로 안장됩니다.
이진 원손, 1921~1922
10여 년 뒤 영휘원 옆에 숭인원이 들어섭니다. 주인은 순헌황귀비의 손자, 의민황태자와 황태자비 이씨(방자) 사이의 첫째 아들 이진 원손입니다.
이진은 1921년 일본에서 태어납니다. 대한제국이 끝난 뒤 일본에 머물던 의민황태자 부부에게 첫 아이가 태어난 해입니다. 1922년, 갓 돌을 지난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채 두 해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할머니 영휘원 바로 옆에 안장됩니다. 그 무덤이 숭인원입니다.

원침에 남은 석물
숭인원과 영휘원은 조선 왕실 무덤 양식을 갖춥니다.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이 있습니다. 문석인은 능침을 호위하는 돌사람이고, 망주석은 봉분 곁의 돌기둥입니다. 아래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과, 원의 내력을 적은 비를 보호하는 비각이 있습니다. 조선 왕실 말기의 장례 예법과 석물 배치가 한 터에 남아 있습니다.
할머니의 원과 손자의 원이 나란한 이유는 혈연과 시기입니다. 엄씨는 영친왕을 낳은 황귀비이고, 이진은 그 아들의 첫째입니다. 1911년에 청량리에 묻힌 원 옆에, 일본에서 태어나 한 살에 죽은 손자를 1922년에 안장했습니다.
연도를 다시 두면, 8살 입궐, 1897년 황태자 출생, 1903년 황귀비 책봉, 1910년 경술국치, 1911년 즉조당에서 사망. 신주는 덕안궁에서 육상궁으로. 손자는 1921년 일본 출생, 1922년 사망, 무덤 이름은 숭인원입니다.
엄씨(1854~1911)는 8살에 입궐해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 됩니다. 1897년 고종과의 사이에서 의민황태자, 곧 영친왕을 낳고 후궁이 됩니다. 1903년 광무 7년에 황귀비로 책봉되어 경선궁에 살았습니다. 진명여학교와 명신여학교, 지금의 숙명여학교를 세우고, 양정의숙의 재정난에 땅 200만 평과 내탕금을 내놓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듬해, 덕수궁 즉조당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신주는 덕안궁에 두었다가 육상궁 경내로 옮기고, 유해는 청량리에 영휘원으로 안장했습니다.
그 손자 이진은 의민황태자와 황태자비 이씨, 방자 사이의 첫째입니다. 1921년 일본에서 태어나 1922년, 갓 돌을 지나 세상을 떠납니다. 두 해를 채우지 못한 채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할머니 원 바로 옆에 묻혔고, 그 원의 이름이 숭인원입니다. 1911년의 할머니와 1922년의 손자가 한 숲에 있습니다.
원침의 석물은 조선 왕실 무덤의 배치를 따릅니다.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이 봉분 곁에 있고,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습니다. 청량리의 두 봉분이 나란한 이유는, 일본에서 태어나 한 살에 죽은 원손을 황귀비 곁에 안장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청량리동 사적지의 산책로를 따라가면 정자각과 비각 너머로 봉분과 석물이 보입니다.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이 두 원침에 있습니다. 1911년의 영휘원 옆에 1922년의 숭인원이 있는 이유는, 일본에서 태어나 갓 돌 만에 죽은 이진 원손을 할머니 순헌황귀비 곁에 안장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