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 집에서 이름이 세 번 바뀐 궁

덕수궁 · 1593년 임시 궁, 경운궁·서궁을 거쳐 1907년

1593년, 선조가 한양에 돌아왔을 때 머물 궁이 없었습니다. 남은 집 가운데 하나를 임시 궁으로 썼습니다. 그 집이 누구의 집이었을까요.
덕수궁
덕수궁
출처: 위키백과「덕수궁」

이야기

월산대군의 집

이 터는 처음부터 정식 임금의 궁으로 계획되어 지어진 곳이 아닙니다.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개인 사저였습니다. 왕위 계승에서 비켜난 월산대군이 도성 안 이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왕족의 사저로 있던 공간이, 한참 뒤에 왕조의 임시 궁으로 불립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한양의 풍경을 바꿨습니다. 7년 전쟁 동안 도성의 으뜸 궁이던 경복궁은 물론, 창덕궁과 창경궁까지 주요 궁궐이 불에 타 재가 됐습니다. 1593년, 선조 26년입니다.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왕이 머물며 국정을 살필 궁이 단 한 곳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선조는 도성 안에 남아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를 임시 거처로 정했습니다. 사저 한 채만으로는 한 나라의 국정을 총괄하기에 좁았습니다. 그래서 월산대군 집 주변에 있던 계림군의 사저와 심의겸의 사저까지 합쳐, 하나의 큰 구역으로 묶었습니다. 왕족과 사대부의 집을 끌어모아 만든 임시 궁. 오늘 덕수궁이 태어난 배경이 여기입니다.

임시 궁이라 불렸지만, 전후 복구의 지휘가 이 공간에서 이뤄졌습니다. 선조가 여기서 전열을 다시 잡았고,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도 한동안 이곳을 왕궁으로 사용했습니다.

경운궁, 그리고 서궁

광해군 즉위 3년, 1611년. 이 임시 궁에 비로소 공식 이름이 붙습니다. 경운궁입니다. 광해군은 1615년, 새로 중건한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이곳을 왕궁으로 썼습니다. 창경궁으로 옮긴 뒤, 경운궁은 왕이 머무는 궁의 자리를 내려놓습니다.

그 다음 장면의 인물은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입니다. 광해군에게는 어머니뻘이 되는 대비입니다. 치열한 정치적 갈등 끝에 인목대비가 이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유폐됐습니다. 광해군은 자신이 1611년에 경운궁이라 높여 불렀던 곳을, '서쪽의 궁'이라는 뜻의 서궁으로 낮춰 불렀습니다. 임금이 국정을 살피던 궁이, 대비가 갇혀 지내는 곳이 됐습니다. 인목대비는 바깥 세상과의 교류가 끊긴 채, 이 전각 안에서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이 일어났습니다. 인조는 서궁에 갇혀 있던 인목대비를 찾아가 승인을 받고 즉위 절차를 밟았습니다. 유폐되어 있던 공간이, 다시 즉위가 결정되는 현장이 됐습니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반정 직후 서궁의 영역을 크게 줄였습니다. 왕실의 상징이 남은 즉조당과 석어당, 두 전각만 남겨 두었습니다. 임시 궁을 만들며 합쳐 두었던 나머지 집과 부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헐어 없앴습니다. 전란 때 급히 넓혔던 궁이, 사가와 작은 전각 중심으로 축소된 것입니다.

그 후 오랜 세월 경운궁은 왕조의 중심에서 비켜, 조용히 그 규모를 유지했습니다.

다시 궁이 되고, 덕수궁이 되다

19세기 말, 조선이 대외의 격변을 맞으면서 이 터가 다시 앞으로 나옵니다.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이전했습니다. 경운궁은 그때부터 궁궐다운 전각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은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다른 궁으로 옮기지 않고 계속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퇴위한 태상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으로,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월산대군의 사저에서 임시 궁으로, 1611년의 경운궁에서 인목대비가 유폐된 서궁으로, 대한제국의 궁을 거쳐 태상황제의 거처로. 이름이 바뀐 횟수를 헤아리면 경운궁, 서궁, 덕수궁, 세 번입니다. 300년이 넘는 그 이름의 출발점은 1593년, 성종의 형 월산대군 집입니다.

지금

석어당
석어당
출처: 위키백과「덕수궁」

도심 한가운데, 높은 건물들 사이에 덕수궁이 있습니다. 석어당은 단청을 칠하지 않아 나무의 결이 남은 2층 목조 건물입니다. 인조가 즉조당과 함께 남긴 두 전각 가운데 하나입니다. 선조가 1593년 전란 뒤 머물던 임시 궁, 인목대비가 유폐됐던 서궁의 영역이 이 터와 겹칩니다.

같은 구역에 근대식 건물인 중명전, 정관헌, 돈덕전도 있습니다. 월산대군 사저에서 시작된 조선의 임시 궁과,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시기의 건물이 한 담장 안에 있습니다.

처음의 질문으로 닫습니다. 1593년 선조가 임시로 쓴 집은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옆의 계림군·심의겸 집까지 합친 구역이었습니다. 광해군이 1611년에 붙인 이름이 경운궁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한 뒤 낮춘 이름이 서궁이며,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장수를 빈다고 고친 이름이 덕수궁입니다. 세 이름이 그 집 위에 차례로 붙었죠.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타고, 1593년(선조 26년) 머물 궁이 없자 선조가 월산대군 집과 계림군·심의겸 집을 임시 궁으로 묶었습니다.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경운궁이라 이름하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썼습니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유폐되자 서궁으로 낮췄고, 1623년 인조반정 때 인조는 인목대비의 승인을 받아 즉위한 뒤 즉조당·석어당만 남기고 나머지를 주인에게 돌리거나 헐었습니다. 19세기 말 러시아 공관에 있던 고종이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했고, 1907년 이름이 덕수궁이 됐죠. 석어당은 단청 없는 2층 목조이고, 중명전·정관헌·돈덕전이 같은 구역에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덕수궁은 처음부터 궁이었나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였습니다. 1593년(선조 26년) 궁들이 불타 선조가 이곳과 계림군·심의겸의 집을 합쳐 임시 궁으로 썼습니다.
경운궁과 서궁, 덕수궁은 어떻게 이어지나요?
광해군이 1611년에 경운궁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인목대비를 유폐한 뒤에는 서궁으로 낮춰 불렀습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계속 머물며,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쳤습니다.
인조반정 뒤 무엇이 남았나요?
1623년 인조는 인목대비의 승인을 받아 즉위했습니다.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기고, 나머지 집과 부지는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철거했습니다.

같이 보면

  • 경복궁 · 지도 · 글 1592년 임진왜란 때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불탄 궁
  • 창덕궁 · 지도 · 글 1592년에 함께 불타, 선조가 이곳을 임시 궁으로 쓰게 된 배경
  • 창경궁 · 지도 1615년 광해군이 경운궁에서 거처를 옮긴 궁

출처

국가유산청 문화재공간정보, 위키백과「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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