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조선의 절 가운데는 왕실과 묶인 곳이 있습니다. 왕실 인물이 세상을 떠난 뒤 넋을 기리고 명복을 빌라고 지정한 절을 원당이라 합니다. 서울 신촌, 안산 자락의 봉원사도 영조 대에 그 원당이 됐죠. 지정된 계기는 어린 세손 한 사람입니다.
의소세손은 영조의 첫 손자입니다. 1750년에 태어나 175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중 조선 22대 왕으로 즉위하는 정조의 동복형이죠. 태어난 1750년은 왕실에서 별도로 세어지는 해입니다. 영조가 아끼던 딸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던 해이기 때문입니다. 화평옹주의 3년 상이 끝나 가던 그달, 8월 27일에 의소세손이 태어났습니다.
첫 손자는 두 해를 갓 넘기고 1752년에 죽었습니다. 두 살이죠. 묘 이름은 의소묘입니다. 왕실은 이 어린 세손의 넋을 기리고 명복을 빌 원당으로 봉원사를 지정했습니다.
원당은 명단에 이름만 올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절에서 세손의 명복을 비는 재를 올리고, 그 재를 관리하려면 사찰의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왕실은 봉원사에 토지, 곧 사위전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위전을 주는 과정에서 두메 고을의 살림이 기록에 올라옵니다.
영조 31년, 1755년 11월 20일입니다. 예조가 영조에게 올린 아뢰임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근거는 황해도 감사가 보낸 문서입니다. 수안군은 두메산골의 피폐한 고을이었습니다. 수안군 12개 방의 화전은 이미 여러 궁방의 절수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고을에 남은 것은 율계 1개 방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약간의 화전세로, 고을 관청의 운영비를 겨우 보충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안군 땅에 의소묘의 원당인 봉원사 위전이 새로 지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대로 봉원사 위전으로 확정되면, 이미 궁핍한 수안군 백성과 관청은 더 버티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예조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었습니다. 특교에 따라 봉원사 위전으로는 이미 용인 지역의 땅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용인을 주고도 수안군 땅까지 겹쳐 사위전으로 줄 수는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수안에서 절수하려던 땅은 도로 원래 고을에 소속시키는 것이 맞다고 왕에게 건의했습니다.
영조는 예조가 아뢴 바를 그대로 따르라고 승인했습니다. 용인 땅은 사위전으로 획급해 원당의 재정을 보장했습니다. 수안군 땅은 원래 고을로 돌려, 겹친 부담을 덜게 했습니다. 세손의 원당을 지정하고 땅을 주려 한 일과, 두메 고을의 화전세를 도로 돌린 일이 같은 날의 결정입니다.
봉원사가 원당이 된 이유는 1752년, 두 살에 죽은 의소세손입니다. 정조의 동복형이고, 묘 이름은 의소묘입니다. 위전의 최종 땅은 용인입니다. 수안군은 1755년 11월 20일 실록에 올라온 뒤, 고을 소속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지금
지금 봉원사에 가면 칠성각 건물이 있습니다. 영조 대에 의소세손의 넋을 기리는 원당으로 봉원사가 지정되고, 용인 땅을 위전으로 받은 기록은 문헌에 남아 있습니다. 칠성각은 그 절에서 오늘 만나는 전각입니다.
1750년 8월 27일에 태어나 1752년에 죽은 세손, 정조의 동복형. 그 묘의 원당이 이 절입니다. 1755년 11월 20일 영조가 승인한 것은 수안군 화전을 더 떼어 주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준 용인 땅을 사위전으로 확정하고, 12개 방이 궁방으로 빠진 뒤 율계 1개 방만 남은 수안군은 원래 고을로 되돌리라는 결정이었습니다.
실록이 적은 순서를 다시 밟으면 이렇습니다. 의소세손은 화평옹주의 3년 상이 끝나 가던 1750년 8월 27일에 태어나, 1752년 두 살에 죽었습니다. 묘는 의소묘, 원당은 봉원사입니다. 재를 올리려면 위전이 필요했고, 특교로 용인 땅이 이미 내려가 있었습니다. 1755년 11월 20일 황해도 감사의 문서를 받은 예조는, 12방 화전이 궁방에 들어가고 율계 1방의 화전세만 남은 수안군에 위전을 또 줄 수 없다고 아뢰었습니다. 영조는 그 아룀을 승인했습니다. 용인은 사위전으로 남고, 수안은 고을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그 절에서 만나는 건물이 칠성각입니다. 신촌 안산 자락의 그 원당 기록은, 영조 31년 11월 20일 실록에 그대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