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1405년의 이궁
태종 5년, 1405년입니다. 조선은 법궁인 경복궁 밖에, 따로 머물 궁으로 창덕궁을 창건했습니다. 당시 으뜸 자리는 경복궁이었죠. 창덕궁은 왕이 필요할 때 머무는 보조 궁궐, 곧 이궁으로 계획됐습니다.
건축의 줄도 달랐습니다. 남북의 곧은 축을 따라 건물을 일직선으로 늘어놓는 격식 대신, 창덕궁은 처음부터 매봉산 자락의 나지막한 지형과 경사를 있는 그대로 품었습니다. 산세가 비틀어지면 건물도 방향을 틀었습니다. 숲이 깊어지면 그 결을 따라 쉼터와 연못을 앉혔습니다. 자연을 파헤쳐 땅을 바르게 펴기보다, 굽이치는 땅의 모양에 건축을 맞춘 궁입니다.
들머리는 금천교입니다. 그 다리를 건너면 나지막한 언덕과 숲으로 돌길이 이어집니다.
1610년, 먼저 다시 선 궁
태종 때 들어선 이 이궁의 쓰임은, 임진왜란으로 바뀝니다. 선조 25년, 1592년입니다. 전쟁이 나면서 한양의 주요 궁인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재가 됐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나라의 정치를 다시 일으켜 세울 궁이 필요했죠. 소실된 궁 가운데 어디를 먼저 다시 지을지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광해군 2년, 1610년입니다. 조정은 경복궁보다 먼저, 보조 궁궐이던 창덕궁의 중건을 마치기로 하고 복원을 끝냈습니다. 잿더미에서 제일 먼저 다시 선 창덕궁은, 이때부터 조선의 대표 궁이자 실질적인 법궁이 됐죠.
고종 4년, 1867년 경복궁이 다시 중건될 때까지입니다. 그 270여 년 동안 역대 왕들은 경복궁이 아닌 이곳 창덕궁에 거주하며 국정을 수행했습니다. 1405년의 이궁이, 그 사이 왕이 먹고 자며 나랏일을 본 궁이 된 것입니다.
270년 동안 늘어난 영역
법궁으로 쓰인 270년 동안 안의 영역은 넓어지고 역할이 나뉘었습니다. 왕의 즉위식이나 하객을 맞이하는, 나라의 가장 큰 행사를 치르던 정전은 인정전입니다. 국왕이 대신들과 머리를 맞대고 매일의 정사를 보던 편전은 선정전입니다. 왕과 왕비가 일상을 보내고 잠자리에 들던 내전은 희정당과 대조전입니다.
인근 창경궁과 묶어 동궐이라 불렸습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옥류천, 규장각, 주합루, 연경당, 낙선재가 잇따라 들어섰고, 궁의 영역은 더 넓어졌습니다. 뒤편의 후원에는 부용지와 애련지 같은 연못이 있고, 숲과 크고 작은 정자가 있습니다.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숲을 남긴 후원은, 왕들이 정치의 짐에서 잠시 벗어나 정국을 구상하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태종의 손에서 이궁으로 태어났습니다. 임진왜란으로 탄 뒤 광해군 대인 1610년에 먼저 복구됐습니다. 고종 대, 1867년 경복궁이 다시 서기 전까지 270여 년 동안 조선의 정치와 왕실의 일상을 담았습니다. 매봉산 경사에 맞춘 배치는 그 기간의 뼈대였습니다.
지금
서울 도심에 창덕궁이 남아 있습니다. 비탈진 언덕을 따라 꺾인 담장과, 굽은 지붕 선이 보입니다. 땅을 반듯한 축으로 펴지 않고, 산의 경사에 건물을 앉힌 배치입니다.
왕비의 생활 공간이던 대조전도 그 안에 있습니다. 즉위와 큰 행사의 인정전, 매일 정사를 보던 선정전, 내전의 희정당, 후원의 부용지와 애련지도 같은 궁에 있습니다. 옥류천과 규장각, 주합루, 연경당, 낙선재는 후기에 더해진 영역입니다.
처음의 대비로 닫으면 이렇습니다. 1405년 태종 5년의 창덕궁은 경복궁 다음의 이궁이었습니다. 1592년에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함께 탄 뒤, 1610년 광해군 2년에 가장 먼저 다시 섰습니다. 1867년 고종 4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270여 년, 왕들이 실제로 국정을 본 법궁이 창덕궁이었습니다.
그 270년을 칸으로 나누면, 즉위식과 하객의 정전은 인정전, 매일 정사의 편전은 선정전, 왕과 왕비의 내전은 희정당과 대조전입니다.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 불렸고, 후기에는 옥류천·규장각·주합루·연경당·낙선재가 더해졌습니다. 후원에는 부용지와 애련지, 숲과 정자가 있습니다. 건물은 매봉산 자락의 경사에 맞춰 앉혔습니다. 산세가 꺾이면 방향도 꺾였습니다. 들머리의 금천교를 건너 언덕과 숲으로 들어가는 길이, 1405년 이궁이 1610년 이후 법궁이 된 자리입니다. 고종 4년 경복궁이 다시 서기 전까지, 왕들이 먹고 자며 국정을 본 궁이 여기였습니다. 1405년의 이궁이 1610년부터 270여 년 법궁이었습니다. 경복궁이 다시 중건된 해가 1867년입니다. 그 전까지가 270여 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