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1614년, 광해군 6년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경계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사이 화평 교섭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 이해룡입니다. 교섭을 수행한 공으로 경천군에 봉해집니다. 광해군은 그 공훈의 대가로 사패지(賜牌地)를 내립니다. 임금이 사패로 소유와 관리를 인정한 토지입니다.
토지를 내리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패지 경계에 비석을 세웁니다. 이름이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인 이유입니다. 송금(松禁)은 지정한 구역의 소나무를 무단으로 베지 못하게 하고, 그 숲을 보호하던 정책입니다.
조선에서 소나무는 궁궐 재목, 전함 재목, 왕릉과 궤의 재목이었습니다. 나라의 목재로 관리됐습니다.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것이 송금입니다. 이 정책은 고려 때부터 소나무가 자라기 좋은 곳을 정해 벌목을 금한 데서 이어집니다. 조선에서는 금산(禁山)과 봉산(封山)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산 전체를 막아 일반인의 출입과 벌목을 금하거나, 나라에서 쓸 목재를 위해 봉해 두는 방식입니다.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소나무 보호와 관리가 이어졌다고 정리됩니다.
사패지라도 안의 소나무는 따로 다뤘습니다. 임금이 내린 땅이라고 해서 아무나 들어와 나무를 베거나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됐습니다. 1614년, 광해군은 이해룡 사패지 경계에 비를 세우게 합니다. 경계 안의 소나무를 무단으로 침범하거나 벌목하는 일을 금한다는 경고입니다. 공신의 사패지와 국가의 송금이 비석 하나에 같이 적힌 셈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문집, 지방지에는 송금, 금산, 벌목 금지 기록이 반복됩니다. 글만 보면 송금비와 금표가 여러 산골에 있었을 법합니다. 실물로 남은 송금비는 거의 없었습니다. 전쟁, 마모, 근대화 속에서 문헌 속 표석이 사라졌습니다.
이 사패지의 비가 전국에서 실물로 확인된 조선 시대 송금비입니다. 한 사람의 땅 경계석으로만 두면, 기록이 말하던 임업 정책의 현물이 빠집니다. 문헌에 있던 벌목 금지가 돌 위에 남아 있는 사례로 이 비가 꼽힙니다.
기록과 조사에는 이 일대 송금비가 원래 2기였다고 나옵니다. 1기는 소재를 알 수 없게 됐습니다. 남은 1기가 서울특별시기념물입니다. 나머지 1기의 행방은 확인 중입니다.
이해룡은 임진왜란 전후 대일 화평 교섭의 사람입니다. 광해군은 1614년에 땅을 내리고 경계의 소나무를 베지 말라 했습니다. 그 명령이 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2기 가운데 1기가 그 명령을 아직 보여 줍니다.
1614년은 광해군 6년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과 일본 사이 경계는 남아 있었습니다. 이해룡은 그 사이 화평 교섭을 수행해 경천군에 봉해집니다. 광해군이 내린 보상은 사패지입니다. 사패는 임금이 내린 문서이고, 그 땅의 소유와 관리를 인정한 토지입니다. 땅만 내린 것이 아닙니다. 경계에 비를 세웁니다.
송금의 대상은 소나무입니다. 궁궐을 짓고, 전함을 만들고, 왕릉과 궤를 짜는 재목이었습니다. 국가가 베지 못하게 한 정책이 송금입니다. 고려 때는 소나무가 잘 자라는 곳을 정해 벌목을 금했습니다. 조선은 금산과 봉산으로 이를 이어 갑니다. 금산은 출입과 벌목을 막는 산이고, 봉산은 나라 목재를 위해 봉한 산입니다. 태조부터 고종까지 그 관리가 이어졌다고 정리됩니다.
사패지 안의 나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사받은 땅이라도 아무나 들어와 베거나 경계를 넘으면 안 됐습니다. 비의 문장은 그 금지입니다. 무단 침범과 벌목을 금한다는 경고입니다. 공신의 땅과 나라의 숲 보호가 한 비에 있습니다.
실록, 경국대전, 문집, 지방지에는 송금과 금산, 벌목 금지가 반복됩니다. 글의 수만큼 비가 남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전쟁과 마모, 근대화 속에서 표석이 사라졌습니다. 실물로 확인된 조선 시대 송금비는 이 사패지의 비입니다. 원래 2기였고, 1기는 소재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남은 1기가 서울특별시기념물입니다. 원형은 비교적 유지된 채 서 있습니다. 이해룡의 군호는 경천군이고, 땅의 이름은 사패지이며, 비의 기능은 송금입니다. 소나무는 궁궐·전함·왕릉과 궤의 재목이었고, 금산과 봉산은 그 나무를 막거나 봉한 산입니다. 문헌의 송금은 실록과 경국대전, 문집과 지방지에 남아 있습니다. 돌로 남은 송금비는 이 1기이고, 짝이었던 나머지 1기는 소재 확인 중입니다.
지금
남은 1기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한 채 서 있습니다. 서울특별시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국에서 확인된 송금비 사례이고, 조선 시대 임업사에서 실물로 남은 유적으로 정리됩니다. 또 1기의 소재는 확인 중입니다.
문헌에는 송금이 많은데 왜 이 비만 보이느냐는 질문에는, 실물 쪽이 답을 줍니다. 다른 산의 송금비는 거의 사라졌고, 이해룡 사패지에 세운 2기 가운데 이 1기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1614년 광해군이 경천군 이해룡에게 사패지를 내리고, 경계의 소나무 벌목을 금하라고 세운 비입니다. 고려의 벌목 금지, 조선의 금산과 봉산, 태조부터 고종까지의 소나무 관리가 문헌에 있고, 그 정책의 돌은 여기 1기입니다. 실록과 경국대전, 문집과 지방지에 송금·금산·벌목 금지가 아무리 많아도, 지금 실물로 확인되는 송금비는 이해룡 사패지의 이 1기입니다. 짝비 1기는 소재 확인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