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서북쪽 고갯길의 문 하나. 영조는 왜 하필 이 문루에 반정 공신의 이름을 걸었을까요.
조선 태조 5년, 1396년입니다. 한양에 도성을 쌓으며 사대문과 사소문을 두었습니다. 창의문은 사소문 가운데 서북쪽 문입니다. 도성에서 북서쪽을 거쳐 양주와 고양으로 오가는 교통로였습니다. 고갯길은 가팔랐습니다. 북쪽으로 넘려면 빠지기 어려운 문이었습니다.
90년을 잠근 풍수
문을 세운 지 20년이 안 된 태종 16년, 1416년입니다. 태종은 풍수지리를 이유로 창의문을 잠그고 통행을 금지했습니다. 도성 북서쪽 맥을 해치거나 왕기의 흐름을 어지럽힌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뒤로 90년 동안 발길이 끊겼습니다.
다시 열린 해는 중종 1년, 1506년입니다. 양주와 고양으로 가던 사람들이 고갯길로 돌아왔습니다.
그 개방에서 110여 년 뒤, 이 문의 이름이 가장 크게 남습니다.

1623년의 문짝, 1742년의 현판
1623년의 밤입니다. 도성 밖에서 능양군과 반정군이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른 진입로는 창의문이었습니다. 반정군은 문짝을 부쉈습니다. 문을 가로막던 장향을 깨뜨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길은 궁으로 이어졌습니다. 인조반정이 이 문으로 성사되었습니다.
풍수 때문에 90년 닫혀 있던 서북쪽 소문이, 왕을 바꾸는 길목이 된 해입니다.
임진왜란 때 문 위의 문루는 불탔습니다. 돌로 쌓은 육축만 남았습니다. 육축은 문 아래의 돌 몸체입니다.
영조 17년부터 18년, 1742년에 영조는 문루를 다시 세우게 했습니다. 중건과 함께 한 가지를 더했습니다. 100여 년 전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간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나무판에 새겨, 문루 위에 걸게 한 것입니다.
영조가 현판을 건 이유는 기록에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반정의 역사를 기억하고, 왕실의 정통성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도성의 문이면서, 정변과 권력의 이동을 적은 현판이 같은 문루에 올랐습니다.
지금
문루를 올려다보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처럼 장대석으로 쌓은 육축 위에 문루가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입니다. 남쪽으로 낮아지는 지형을 살린 등성시설이 있습니다. 등성시설은 문으로 오르는 경사로입니다. 여장에는 총안이 없습니다. 여장은 성 위에 쌓은 낮은 담이고, 총안은 총을 쏘려고 낸 구멍입니다. 전돌로 쌓은 그 여장이 조선 후기 도성 공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태조가 1396년에 세웠습니다. 태종이 1416년에 닫았습니다. 중종이 1506년에 열었습니다. 능양군이 1623년에 부수고 들어왔습니다. 영조가 1742년에 문루를 다시 세우고 공신 이름을 걸었습니다.
한양도성 사소문 가운데, 옛 문루의 형태를 비교적 온전히 유지한 문은 창의문입니다. 영조가 이름을 건 곳은, 반정군이 문짝을 부순 바로 그 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