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궐과 종묘를 세운 뒤,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두고 성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태조 5년(1396)경 축성이 본격화되면서 서울 주위를 둘러싼 도성이 만들어졌습니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았고, 대문 넷에 소문 넷을 두었습니다. 동쪽 흥인지문, 서쪽 돈의문, 남쪽 숭례문, 북쪽 숙정문이 대문이었고, 동북 홍화문·동남 광희문·서북 창의문·서남 소덕문이 소문이었습니다.
문마다 기록이 다릅니다. 북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비밀통로인 암문이라 문루를 세우지 않아 다른 문과 겉모습이 달랐습니다. 동쪽 흥인지문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는 옹성을 쌓아, 여덟 문 가운데 유일하게 옹성을 갖춘 문이 되었습니다. 세종 4년(1422)에는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고 방어 시설을 늘렸고, 숙종 30년(1704)에는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습니다. 쌓는 방법과 돌 모양이 시기마다 달라서, 지금 남은 성벽을 보면 어느 시대의 손길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성곽의 많은 구간이 사라진 시점은 일제강점기 도시계획과 맞닿아 있습니다.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1907년부터 1925년까지 성벽처리위원회의 철거로 구간이 유실됐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으로 더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600년 성곽’이라는 말과 ‘1925년까지 철거’라는 숫자가 나란히 있습니다. 오래되어 저절로 사라진 일이 아니고, 도시계획과 성벽처리라는 이름 아래 걷힌 일입니다.
문의 운명을 따로 보면 연표가 더 분명해집니다. 돈의문은 1915년 전차 궤도와 도로 확장을 이유로 철거되어, 한양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실물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소의문은 1914년, 혜화문은 1938년에 사라졌습니다. 동대문과 숭례문은 남아 있지만, 성벽 자체는 종로·중구 곳곳에서 끊겨 있습니다. 장충동 일대는 지금 주택가이지만, 그 아래에는 동대문에서 광희문까지 성벽을 헐어 만든 운동장 자리가 있었고, 지금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서 있습니다.

1904년경 촬영된 동대문 사진에는 성벽과 문루가 한 장면 안에 있습니다. 지금 흥인지문 앞에서 그 사진과 눈앞 풍경을 겹치면, 남은 성벽과 사라진 구간이 바로 옆에 놓입니다. 성곽은 도시 속에 잘린 채 남아 있는 유적입니다. 지정구역에 포함된 남은 성곽은 사적으로 정비·공개되고, 종로·중구 일대에 흩어져 있습니다.
창의문 쪽 기록에는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성곽은 방어선이었고, 동시에 사람들이 드나든 통로였습니다. 20세기에 그 통로는 전차와 도로 앞에서 순서가 밀렸습니다. 성벽이 서울이 자라는 데 걸림돌로 분류된 시기가 이 무렵입니다.
1395년 도성축조도감, 1396년경 축성, 대문 넷과 소문 넷, 숙청문의 암문, 흥인지문의 옹성, 1422년 석성화, 1704년 수직 축성. 그 성곽의 많은 구간이 걷힌 기록은 1907년부터 1925년 성벽처리위원회, 돈의문 1915년, 소의문 1914년, 혜화문 1938년, 장충동 구간의 운동장과 지금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이어집니다. 1907년부터 1925년까지 이어진 철거 위에 전쟁과 개발이 겹치면서, 서울은 성곽 밖으로, 성곽 위로, 성곽 자리 위로 자랐습니다. 지도에서 한양도성 핀을 누르면 긴 경계선이 보이지만, 현장에 가면 그 선의 많은 부분이 건물 뒤에 숨어 있습니다. 남은 돌벽 하나가 사라진 구간을 대신 보여 줍니다.
지금
서울 한양도성을 찾아가면, 남은 구간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곳과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곳이 섞여 있습니다. 종로·중구 일대 잔존 구간은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정비·공개되고, 낙산구간처럼 성벽 위를 걷는 코스도 있습니다. 창의문과 흥인지문처럼 문루가 남아 있는 지점도 있습니다. 돈의문과 소의문처럼 원래 자리에 건물과 도로만 남은 곳도 많습니다.
흥인지문 앞에서 성벽과 옹성을 함께 보면, 여덟 문 가운데 유일하게 옹성을 갖춘 문이라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성벽 선을 따라 걸어가면 어느 순간 끊깁니다. 끊긴 자리 너머로는 고층 건물과 차도가 이어집니다.

돈의문 터 근처, 정동사거리 교차로 위에는 ‘보이지 않는 문’이라는 공공미술이 놓여 있습니다. 문 자체는 1915년에 사라졌고, 그 자리가 서대문이었다는 기억은 다른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종로 쪽에서 지도의 한양도성 선과 거리 풍경을 겹치면, 선 위에 성벽이 없는 구간이 많습니다. 그 빈칸은 1907년부터 1925년 성벽처리위원회의 철거, 일제의 도시계획,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의 파괴가 겹친 결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