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깊이 1.2m인 조선시대 우물 바닥을 파내려갔을 때, 그 아래에서 왜 까마득히 잊혀진 2.5m 깊이의 또 다른 석축이 나왔을까요?
서울 금천구 호암산 정상부에 올라서면 네모나게 잘 다듬어진 큰 연못이 눈에 들어옵니다. 동서 길이 22m, 남북 길이 12m에 이르는 이 우물의 이름은 한우물입니다. '큰 우물' 또는 '하늘 못'이라는 뜻을 지녔죠. 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가뭄에 물이 잘 마르지 않아 예부터 용보라고도 불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비상시에는 산성을 지키는 군용수로 사용했습니다.
조선 초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한양 도성에는 화재에 대한 불안감이 감돌았습니다. 관악산과 호암산의 불기운이 강해서 도성에 불이 자주 난다는 설화가 퍼진 까닭입니다.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쓰고 남산에 해태를 놓았듯, 호암산 정상에도 방화의 염원을 담은 장치가 마련되었습니다.
한우물 근처에서는 해태나 개를 닮은 석상 하나가 발굴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석구지(石拘池)'라고 새겨진 돌도 발견되었습니다. 석구지는 '돌개 못'이라는 뜻입니다. 한양으로 향하는 불길을 누르고 화재를 막기 위해 산 정상의 우물가에 개 모양 동물상을 세우고 연못을 정비했던 셈입니다.
1.2m 석축 바닥 아래에서 드러난 시간
세월이 흘러 젖어 있던 한우물 바닥을 보수하기 위해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사단은 조선시대 석축 바닥의 흙을 걷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지표면에서 30cm 깊이까지는 조선시대 백자 조각들이 주로 출토되었습니다.
백자 조각이 나오던 층을 지나자 유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깨끗하고 굵은 모래층이 나타났습니다. 모래층을 더 파고 내려가자 마침내 물기를 가득 머금은 검은 뻘층이 드러났습니다. 그 뻘층 아래에서 모두를 놀라게 한 유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조선시대 연못 바닥 바로 밑에 또 다른 석축 연못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동서 17.8m, 남북 13.6m 크기의 이 아래쪽 석축지는 깊이가 2.5m에 달했습니다. 위쪽에 있던 조선시대 석축지(깊이 1.2m)보다 훨씬 깊고 거대한 구조였습니다. 두 연못은 서로 평면 위치가 약간 어긋난 상태로 중첩되어 있었습니다.

아래층 석축의 남동쪽 모서리를 조사해 보니 돌이 13단으로 정교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제일 아랫단을 20cm 정도 앞으로 낸 뒤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들여 쌓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신라 경주 안압지(월지)를 만들 때 사용했던 축조 수법과 완벽히 일치했습니다. 뻘층에서는 7~8세기에 만들어진 신라 토기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옛 신라의 연못 터 위에 모래를 채워 메운 뒤, 그 위에 자신들의 우물을 새로 다듬어 사용했던 것입니다. 한우물에서 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제2우물지에서는 '잉벌내력지내미(仍伐內力只內未)'라는 글씨가 새겨진 청동숟가락도 발견되었습니다. 조선의 우물 밑에 갇혀 있던 1,300년 전 물길의 기억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호암산 정상에는 조선시대의 한우물과 복원된 석축 연못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물 옆에는 한양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세웠던 개 모양 석상과 석구지 명문석이 남아 옛 이야기를 전합니다. 주변으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이어진 1,250m 산성 중 약 300m의 성벽 흔적과 건물지 터 4곳이 함께 보존되어 있습니다. 1991년 사적 '한우물 및 주변산성지'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서울 호암산성'으로 명칭이 통합 변경되었습니다. 산마루를 따라 올라가면 조선의 한우물 석축 아래 겹쳐 있던 신라의 연못 레이어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