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갑옷을 만들던 왕이, 폐위된 해에 강화도에서 죽다

서울 연산군묘 · 방학동 쌍분, 왼쪽이 연산군

도봉구 방학동의 묘는 왕릉이 아닙니다.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군부인 신씨입니다.
서울 연산군묘_문석인1
서울 연산군묘_문석인1
출처: 본 저작물은 '국가유산청'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서울 연산군묘_문석인1'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유산청, www.kh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

봉분 두 기가 나란합니다.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왕릉의 형식이 아니고, 군묘로 남아 있습니다. 왜 왕릉이 아닌지는 1506년으로 가야 답이 나옵니다.

1494년, 사치 단속과 비융사

연산군은 1476년, 9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릅니다. 즉위 초 조정에는 성종 대의 안정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젊은 임금은 그 위에 쇄신책을 둡니다.

먼저 사치 풍조를 단속합니다. 왕실과 조정, 민간의 낭비와 사치를 막기 위해 구체적인 금지 조항을 정해 지켰습니다.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제도도 새로 정비합니다.

국방에는 비융사를 설치합니다. 비융사는 무기를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쇠로 철갑옷과 무기를 만들어 내는 관청이었습니다. 즉위 초의 기록은 기강을 세우고 안보를 점검하던 쪽으로 남아 있습니다.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1498년 무오사화가 납니다.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사관 김일손 등이 낸 사초가 문제가 됩니다. 그 안에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훈구파가 사림파를 공격하고, 사림이 큰 화를 입습니다.

1504년 갑자사화는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이 도화선입니다. 척신들이 이 사건을 이용했고, 폐비 윤씨 사건과 얽힌 훈구파와 사림파 신하들이 함께 화를 입습니다.

두 사화 이후 연산군은 국정에서 손을 놓습니다. 조정은 사치와 향락으로 어지러워지고, 기강과 민생은 무너집니다. 비융사에서 철갑옷을 만들던 즉위 초의 정책은 그 뒤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연산군묘
연산군묘
출처: 위키백과「연산군묘」

1506년, 군묘가 된 이유

1506년 박원종 등이 정변을 일으킵니다. 중종반정입니다.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그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왕위를 잃었기 때문에 묘는 왕릉의 격식을 받지 못하고 군묘로 남습니다.

곁을 지킨 이는 거창군부인 신씨입니다. 1476년에 태어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됩니다. 1506년 반정으로 왕비에서 폐위되고, 1537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방학동의 쌍분에서 왼쪽이 연산군, 오른쪽이 신씨입니다. 묘역은 정비되어 일반에 공개되어 있고, 무석인과 석물이 봉분 앞에 있습니다. 홍살문과 병풍석은 없습니다.

연도를 다시 두면, 1476년 출생, 1494년 즉위,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1506년 반정과 강화도 유배, 그해 사망입니다. 신씨는 1476~1537. 즉위 초의 일은 사치 금지, 종묘 신주 정비, 비융사의 철갑옷·무기 생산입니다. 왕릉이 아닌 이유는 1506년의 폐위입니다.

즉위 초 기록을 다시 짚으면, 1494년 당시 조정에는 성종 대의 안정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젊은 임금은 사치 금지 조항을 만들고 종묘 신주 제도를 정비했으며, 비융사를 두어 철갑옷과 무기를 생산하게 합니다. 비융사는 무기를 보관만 하던 곳이 아니라, 쇠를 다듬어 갑옷과 병기를 직접 만들던 관청이었습니다.

1498년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사초에서 불거집니다. 김일손 등이 낸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들어 있었고, 훈구파가 사림파를 공격합니다. 1504년 갑자사화는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이 도화선이었습니다. 척신들이 그 사건을 이용했고, 윤씨 일과 얽힌 훈구·사림이 함께 화를 입습니다. 두 사화 뒤 연산군은 국정에서 손을 놓습니다. 사치와 향락이 조정을 어지럽히고, 즉위 초에 두었던 단속과 비융사의 생산은 그 뒤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1506년 박원종 등의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갑니다. 유배된 그해에 세상을 떠납니다. 왕위를 잃었으므로 묘는 왕릉의 병풍석·난간석·홍살문을 갖추지 못한 군묘입니다. 거창군부인 신씨는 1476년생으로, 연산군 즉위와 함께 왕비가 되었다가 1506년에 폐위되고 1537년에 죽습니다. 방학동 쌍분의 왼쪽이 연산군, 오른쪽이 신씨입니다. 무석인과 석물이 봉분 앞에 있고, 묘역은 정비되어 일반에 열려 있습니다. 철갑옷을 만들던 즉위 초가 군묘로 끝난 이유는, 1506년 반정과 그해의 죽음 때문입니다.

지금

방학동 쌍분은 왼쪽이 연산군, 오른쪽이 거창군부인 신씨입니다. 무석인이 봉분 앞을 지키고, 왕릉의 병풍석·난간석·홍살문은 없습니다. 철갑옷을 만들던 즉위 초와, 유배지에서 죽은 1506년이 한 묘역에 있습니다. 군묘인 까닭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1476년에 태어나 1494년에 즉위한 왕이, 1498년과 1504년의 사화를 거치고 1506년 강화도에서 죽습니다. 곁의 신씨는 1537년까지 살았습니다. 왕릉이 아닌 쌍분이 방학동에 있는 이유는 그 폐위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연산군묘는 왜 왕릉이 아닌 군묘의 형태인가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왕위에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릉의 격식을 갖추지 못하고 군묘의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연산군묘에는 누구와 함께 묻혀 있나요?
연산군과 그의 부인이자 중종반정으로 왕비에서 폐위된 거창군부인 신씨(1476~1537)가 쌍분 형태로 함께 묻혀 있습니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 어떤 정책을 펼쳤나요?
사치 풍조를 잠재우기 위한 금지 조항 제정, 종묘 신주 정비, 그리고 비융사를 설치하여 철갑옷과 무기를 생산하는 등 국방과 정사 쇄신에 힘썼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포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유산청 오픈API

지도에서 보기 유적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