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싱가포르 최대 미술관 내셔널 갤러리의 발밑에는 서기 3000년에 열기로 한 타임캡슐이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건물의 한 방에서는 싱가포르의 주인이 두 번 바뀌었습니다. 미술관이 되기 전, 이곳은 시청과 대법원이었습니다.
무역항이 커지자 관청이 모자랐다
1920년대 영국 식민지 싱가포르는 무역항으로 빠르게 커졌습니다. 도시를 다스릴 관청이 모자라자 파당 광장 앞에 새 시청사(Municipal Building)를 지어 1929년 문을 열었습니다. 건축가 S.D. 메도스와 A. 고든이 설계한 신고전주의 건물로, 공사비는 200만 해협달러였습니다.

얼마 뒤 바로 옆, 1936년에 헐린 그랜드 호텔 드 뢰로프(유럽 호텔) 자리에 대법원이 들어섰습니다.

머릿돌 밑의 캡슐, 열어 볼 날은 서기 3000년
1937년 4월 1일, 당시 총독 셴턴 토머스가 대법원의 머릿돌을 놓았습니다. 당시 말라야 전체에서 가장 큰 머릿돌이었다고 합니다. 그 밑에는 1937년 3월 31일자 싱가포르 신문 여섯 부와 동전 몇 닢을 담은 캡슐을 묻었는데, 꺼내 볼 날은 서기 3000년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1939년 8월 3일 문을 연 대법원은 영국 식민지 시대 싱가포르에 지어진 마지막 고전 양식 건물이 됐습니다.

전쟁의 마무리는 이 두 건물에서
대법원이 문을 연 지 2년 반 뒤인 1942년 2월,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했습니다. 일본은 바로 그 시청사에서 '쇼난(昭南)'이 된 도시를 다스렸습니다. 1943년에는 인도 독립운동가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이 건물에서 일본과 손잡고 영국과 싸우자고 호소했습니다. 시청은 일본의 선전 무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1945년 9월 12일, 이 건물의 시청 회의실(City Hall Chamber)에서 일본 남방군을 대표한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장이 연합군 동남아시아 사령관 마운트배튼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듬해인 1946년에는 옆 대법원에서 일본군 전범 재판이 열렸습니다. 싱가포르의 전쟁은 이 두 건물에서 정리된 셈입니다.

같은 건물에서, 이번엔 싱가포르인의 정부가
1951년 영국 국왕 조지 6세가 싱가포르에 시(city) 지위를 주면서 시청사는 '시청(City Hall)'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1959년 싱가포르가 자치권을 얻자, 리콴유 총리와 여덟 명의 장관이 바로 그 시청 회의실에서 취임 선서를 했습니다. 14년 전 일본이 항복한 방에서, 이번에는 싱가포르인들이 자기 정부를 세운 것입니다.
1963년 리콴유는 이 시청 계단에서 말레이시아 합류를 선포했고, 2년 뒤 말레이시아에서 분리 독립한 싱가포르는 1966년 첫 국경일 퍼레이드도 이 계단 앞에서 열었습니다.
빈 두 건물이 미술관이 되기까지
나라가 커지자 이번에는 두 건물이 비좁아졌습니다. 대법원은 2005년 6월 새 청사로, 시청의 정부 기관들은 2006년 각자의 새 건물로 떠났습니다. 남겨진 두 국가기념물을 두고 싱가포르는 미술관을 택했습니다.
2007년 국제 설계 공모에는 29개국에서 111팀이 응모했고, 스튜디오 밀루(Studio Milou)의 안이 뽑혔습니다. 두 건물은 나무처럼 생긴 기둥이 받치는 얇은 캐노피 지붕으로 이어졌습니다. 약 5억 3천2백만 싱가포르달러를 들인 공사 끝에 2015년 11월 24일, 동남아 미술 9천여 점을 품은 내셔널 갤러리가 문을 열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
항복 서명과 첫 정부의 선서가 오간 시청 회의실은 국가기념물로서 원형 그대로 보존돼 지금도 관람객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리콴유의 옛 집무실과 대법원장의 법정(1호 법정)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발밑, 1937년의 캡슐은 앞으로도 970여 년을 더 기다립니다.
싱가포르 특집 1편 센토사 —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죽음 뒤의 섬'과 같은 시기, 같은 전쟁을 다른 자리에서 기억하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