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년 말 목장 위에 올린 사도세자의 사당

서울 경모궁지 · 1484년 함춘원, 1764년 사당, 정조의 경모궁

인조 대 이후 약 140년 동안 이곳은 왕실 말을 기르는 목장이었습니다. 정조는 즉위하자 이 터의 이름을 경모궁으로 바꿨습니다.
서울 경모궁지_석축 (촬영년도 : 2015년)
서울 경모궁지_석축 (촬영년도 : 2015년)
출처: 본 저작물은 '국가유산청'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서울 경모궁지_석축 (촬영년도 : 2015년)'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유산청, www.kh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의 나지막한 석축과 문. 정조는 왜 말 목장이던 이 터를 아버지 사당으로 골랐을까요.

시작은 성종 대입니다. 1484년, 성종 15년에 성종은 창경궁을 새로 지으면서 궁 동쪽의 지세와 풍수를 보완하려고 이 일대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두르게 했습니다. 궁의 동쪽을 보강하는 자리였고,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히 막았습니다. 1493년, 성종 24년에 '함춘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창경궁의 왕실 정원이 되었습니다.

연산군의 금표, 중종의 환원

연산군 대에 함춘원은 다른 공간이 되었습니다. 경계를 넓히려고 일대의 민가를 철거했고, 정원 둘레에 군대를 두어 백성의 통행과 출입을 막았습니다. 풍수를 위한 금원이 민가를 헐어 만든 통제 구역이 된 것입니다.

중종이 즉위하면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연산군 때 쫓겨난 백성이 돌아와 살 수 있게 했습니다. 민가가 다시 들어섰습니다.

임진왜란 때 함춘원은 다시 흔들렸습니다. 전란 중 덕빈의 시신을 임시로 묻었습니다. 궁궐 정원으로서의 기능은 줄었고, 관리는 소홀해졌습니다.

태복사의 140년

인조 대에 또 한 번 용도가 바뀌었습니다. 방치되던 함춘원의 절반을, 왕실의 말과 마정을 맡는 태복사에 떼어 주었습니다. 정원이 말을 기르고 풀을 먹이는 목장이 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약 140년입니다.

경모궁
경모궁
출처: 위키백과「경모궁」

1764년의 사당, 1776년의 경모궁

140년의 목장이 추모의 공간으로 바뀐 해는 영조 40년, 1764년입니다. 영조는 생을 마감한 아들 사도세자의 사당을 함춘원 터로 옮겼습니다. 말을 기르던 자리에 세자의 사당이 들어섰습니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즉위하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이 있는 이곳을 경모궁이라 했습니다. 경모는 아버지를 사모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의 이름입니다. 1785년, 정조 9년에 경모궁 일대를 정비하고 주변 경관을 가꾸었습니다. 140년의 목장 터가 왕실 추모 공간이 된 것입니다.

1899년, 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었습니다. 신위는 종묘로 옮겨졌습니다. 경모궁은 사당으로서의 기능을 잃었습니다. 신위가 떠난 전각은 비었습니다.

근대화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정원과 사당이던 공간이 의학 교육과 병원의 부지로 바뀌었습니다.

6·25 한국전쟁 때 전각 대부분은 불탔습니다. 숲과 정원, 말 목장, 사도세자의 사당이 있던 넓은 부지는 병원과 대학 교사로 채워졌습니다.

지금

옛 전각은 없고, 병원 교정 한쪽에 함춘문과 석단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함춘문 아래에는 붉은 기와가 있습니다. 환자와 의료진, 학생이 그 앞을 지나갑니다.

정조가 이 터를 고른 이유는, 영조가 1764년에 사도세자 사당을 이미 함춘원으로 옮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1776년 즉위와 함께 이름을 경모궁으로 바꿨고, 1785년에 정비했습니다. 그 전 140년은 태복사의 말 목장이었습니다. 1899년 신위는 종묘로 갔고, 전각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함춘문과 석단입니다.

1484년 성종 15년, 창경궁을 새로 지으며 동쪽 지세와 풍수를 보완하려고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렀습니다. 출입은 막혀 있었습니다. 1493년 성종 24년, 이름이 함춘원이 되어 창경궁의 왕실 정원이 되었습니다. 연산군은 경계를 넓히며 민가를 철거하고, 군대를 두어 통행을 막고 큰 대문을 세웠습니다. 중종은 쫓겨난 백성을 다시 살게 했습니다.

임진왜란 중에는 덕빈의 시신을 임시로 묻었고, 정원의 관리가 소홀해졌습니다. 인조는 함춘원 절반을 말과 마정을 맡는 태복사에 주어, 약 140년 동안 목장으로 썼습니다. 영조 40년 1764년, 사도세자 사당이 이 터로 옮겨 왔습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며 경모궁이라 했고, 1785년 정조 9년에 일대를 정비했습니다. 경모는 아버지를 사모하고 그리워한다는 이름의 뜻입니다.

1899년 광무 3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고 신위는 종묘로 옮겨져 사당 기능이 끝났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6·25 때 전각 대부분이 불탔고, 부지는 병원과 대학 교사가 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에 남은 것은 함춘문과 석단, 붉은 기와입니다.

정조가 말 목장을 고른 이유는, 아버지 사당이 1764년에 이미 함춘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40년의 태복사 목장 위에 경모궁이 선 자리입니다. 성종 15년의 담장, 성종 24년의 함춘원, 연산군의 민가 철거와 통행 금지, 중종의 환원, 임진왜란의 덕빈, 인조의 태복사, 영조 40년의 사도세자 사당, 정조 즉위년의 개명과 1785년의 정비, 1899년의 종묘 이안, 한국전쟁의 소실. 서울대 의대 구내에 남은 함춘문과 석단이 그 순서의 끝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함춘원과 경모궁은 같은 자리인가요?
성종 대에 창경궁 동쪽에 둔 왕실 정원이 함춘원입니다. 영조 40년(1764)에 사도세자 사당이 옮겨 왔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경모궁이 되었습니다.
말 목장이었나요?
임진왜란 이후 관리가 소홀해지자 인조 대에 함춘원 절반을 태복사에 넘겼고, 약 140년 동안 왕실 말을 기르는 곳으로 쓰였습니다.
전각은 왜 없나요?
1899년 신위가 종묘로 옮겨져 사당 기능이 사라졌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건물이 들어섰고, 한국전쟁으로 전각 대부분이 불탔습니다. 지금은 함춘문과 석단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포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경모궁」

지도에서 보기 유적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