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땅에 묻힌 94개 위패, 서울 문묘와 성균관 600년

서울 문묘와 성균관 · 태조의 96칸 창건부터 유생들의 재건과 1894년의 전환까지

태조 7년 한양 숭교방에 96칸 규모로 들어선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국왕조차 정문으로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조선 최고의 성지였습니다.
신삼문
신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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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광복 직후인 1945년 이후, 서울 문묘 마당에서는 의식 하나가 열렸습니다. 동무와 서무에 모시던 성현 112명의 위패 중 한국의 명현 18명의 위패만 대성전으로 옮겨지고, 나머지 94개 위패는 땅에 묻혔습니다. 조선 500년 동안 왕과 유생들이 엎드려 절하던 그 위패들은 왜 땅속으로 들어갔을까요? 그 답을 찾으려면 1395년 태조가 한양 도성 안에 처음 기틀을 잡던 순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96칸으로 시작된 한양의 유교 성지

태조 4년인 1395년, 태조는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을 세운 직후 한성부 숭교방에 문묘와 성균관 조영을 명했습니다.

태조 7년(1398년) 완공된 사당과 학당은 모두 96칸 규모였습니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을 높은 자리에 두고, 뒤편에는 유생들이 글을 읽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서재를 배치했습니다.

이 공간에는 엄격한 의례 격식이 적용되었습니다. 공자의 신위가 들어가는 남쪽의 신문(神門)과 달리, 조선의 국왕은 동쪽에 있는 동삼문(東三門)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왕이 다니는 길인 '어로'와 신위가 다니는 길인 '신로'를 철저히 나눈 것입니다.

태종 10년(1410년), 변계량은 왕명을 받아 성균관과 문묘의 창건 내력과 건축 규모를 담은 묘정비 비문을 지어 마당에 세웠습니다.

묘정비(廟庭碑)는 문묘 마당에 세워 성균관과 문묘의 창건 배경 및 중건 내력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짐승 우리로 변했던 사당과 유생들의 재건

태종 7년(1407년) 화재를 겪고 다시 재건된 공간은 연산군 대에 이르러 뜻밖의 수난을 맞았습니다. 연산군은 성균관과 문묘를 유생들의 학당이 아닌 사냥용 짐승을 기르는 울타리와 연회 놀이터로 바꿔 버렸습니다.

중종 원년(1506년)부터 정비 공사가 시작되어 중종 6년(1511년) 묘정비를 보호하는 비각이 들어섰지만,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며 목조건물 전체가 불타버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국고가 텅 빈 상황에서 움직인 것은 성균관 유생들이었습니다. 유생들은 전국을 돌며 직접 자금을 모았습니다.

선조 34년(1601년) 대성전 중건을 시작으로 1604년 동무와 서무, 신문을 세웠고, 1606년에는 명륜당과 동재, 서재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인조 4년(1626년)에는 전란으로 훼손되었던 묘정비를 다시 새겼습니다. 이정구가 비석 뒤쪽의 음기를 쓰고, 이홍주가 글씨를, 김상용이 전을 써서 마당 동남쪽에 비각과 함께 다시 세웠습니다.

서울 문묘
서울 문묘
출처: 위키백과「서울 문묘」

교육 기능을 잃고 사당으로 남다

조선 500년 동안 인재를 배출하던 성균관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학무아문 소속 성균관급상교서국으로 개편되면서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내려놓게 된 것입니다.

강당으로서의 역할을 끝낸 문묘는 성현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향사 기능만 수행하는 사당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첫 머리에서 던졌던 94개 위패의 행방에 대한 답도 여기에 있습니다. 광복 후 전국유림대회에서는 유교 제향 체계를 정비하면서, 동무와 서무에 모시던 112명의 위패 중 설총, 최치원, 이황, 이이 등 한국 명현 18인의 위패만 대성전으로 옮겨 봉안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던 중국 성현과 제자들의 위패 94개는 흙 속에 묻는 매안 의식을 치렀습니다.

94개의 위패는 땅 밑으로 들어갔지만, 유생들이 직접 일으켜 세운 대성전과 명륜당은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지금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교문 안쪽 오른쪽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삼문 5동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대성전 앞마당에는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향나무인 삼강목과 오륜목이 서 있고, 기단 아래에는 대나무가 자랍니다. 왕이 다니던 동삼문의 어로와 신위가 지나던 신문의 신로는 석판 길로 구분되어 현장에 남아 있습니다.

조선 최고 교육기관의 소임은 1894년 끝났지만, 명륜당 앞마당의 고요함은 대학 교정과 인접해 여전히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서울 문묘에서 왕과 신의 출입문이 왜 달랐나요?
조선시대 문묘 의례에서는 공자와 성현의 위패가 드나드는 남쪽 정문(신문)을 '신로'로 삼고, 국왕은 동쪽 동삼문으로 들어가는 '어로'를 사용해 격식을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성균관 건물은 어떻게 재건되었나요?
선조 34년(1601년)부터 성균관 유생들이 전국에서 자금을 모아 1602년 대성전, 1604년 동무·서무·신문, 1606년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차례로 중건했습니다.
문묘 동무와 서무에 모시던 위패들은 어디로 갔나요?
광복 후 전국유림대회 결의로 한국 명현 18인의 위패는 대성전으로 옮겨 모시고, 나머지 중국 성현 및 제자 94인의 위패는 땅에 묻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문화재공간정보, 위키백과 「서울 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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