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송준길·영의정 김수항의 글씨가 한 비석에 모인 이유

조선 후기 정국의 판도를 바꾼 우의정 이후원과 대모산 자락 묘역 이야기

서울 강남구 자곡동 대모산 자락의 한 무덤 앞에 서면, 비석 하나에 새겨진 이름들에 눈이 머뭅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거두 송준길과 송시열이 각각 글을 짓고, 당대 명필 이정영이 글씨를 썼으며, 영의정 김수항이 머릿돌 전서를 새겼습니다. 당대 정계를 호령한 거물들의 손길이 왜 이 하나의 비석에 모두 모여 있을까요?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출처: 국가유산청, www.khs.go.kr (공공누리 제1유형)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jpg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jpg · 위키백과「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이야기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번째 아들 광평대군의 7대손, 이후원(1598~1660)의 삶은 조선 중기 격동의 현장 그 자체였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에 오른 그는 이듬해 이괄의 난을 수습하는 데 가담했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총융사 종사관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에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척화항전을 주장했습니다.

1644년 좌의정 심기원이 반란을 도모했을 때도 난의 수습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임금의 신임을 얻은 그는 효종이 즉위한 뒤 북벌 계획을 추진할 때 핵심 참모로서 전함 200척을 직접 준비해 모았습니다. 1650년에는 실록청 당상으로 참여해 《인조실록》을 편찬했습니다.

1655년 예조판서가 된 이후원은 추쇄도감제조를 겸했습니다. 추쇄도감(推刷都監)은 도망친 노비를 찾아내 국방 군역이나 관청에 배치하던 특수 관청이었습니다. 그는 전국의 노비를 찾아내 강화도 방어 인력으로 배치했고, 장악원에 소장되어 있던 국악 이론서 《악학궤범》을 새로 개간하여 지방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송시열과 송준길을 조정을 끌어올린 우의정

1657년(효종 8), 이후원은 재상의 자리인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조정에 들어선 그가 한 가장 결정적인 행동은 인재 등용이었습니다.

당시 조정 외곽에 있던 성리학자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송준길을 병조판서로 각각 전격 발굴하고 추천해 중앙 정계의 핵심 보직에 앉혔습니다. 인사와 군권을 거머쥐는 두 판서 자리에 발탁된 송시열과 송준길은 훗날 노론의 영수로 성장하며 조선 후기 정치판을 주도하게 됩니다.

조정의 인재 지형을 새로 그린 이후원은 166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1668년(현종 9) 충정(忠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685년(숙종 11)에는 광주의 수곡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이후원은 자신들을 정치적 중심부로 이끌어준 은인이었습니다.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전경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전경
출처: 위키백과「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명당을 찾아 두 번을 옮겨간 무덤과 네 명의 글씨

조정을 흔들었던 재상이지만, 그의 유골은 한곳에 오랫동안 묻히지 못했습니다.

1660년 사망 직후 그의 무덤은 금천 삼석산에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땅이 풍수지리상 길하지 못하다는 문중의 판단에 따라, 1685년(숙종 11) 광주 세촌 금성산으로 1차 이장되었습니다. 19년이 지난 1704년, 무덤은 다시 현재의 위치인 서울 강남구 자곡동 대모산 동남쪽 자락으로 두 번째 이장을 거쳐 옮겨왔습니다.

1650년 먼저 세상을 떠난 첫째 부인 광주김씨의 묘 역시 이동을 거듭했습니다. 당초 광평대군파 묘역 안에 조성되었다가 1654년 금천 일직촌, 1685년 광주 세촌을 거쳐 1704년 이후원과 함께 이곳 자곡동으로 합장되었습니다.

이후원의 묘역 동남쪽 발치에 서 있는 묘표 하나에는 그가 정계에서 맺었던 인연과 이장의 역사가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1671년 3월, 동춘당 송준길이 이후원의 생애를 담은 비문 글을 썼습니다. 1682년에는 우암 송시열이 묘표 뒤에 덧붙이는 추기(追記)를 지었습니다. 비문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이정영이 썼고, 비석 상단 머릿돌 전서체 제목인 두전(頭篆)은 당시 영의정이자 전서의 대가였던 김수항이 ‘오재상국이충정공묘표’라고 새겼습니다. 비석 하나에 당대 최고 학자와 최고 관료, 명필 4명의 손길이 한데 모인 셈입니다.

이 묘표 바로 옆에는 1685년 6월, 이후원의 넷째 아들 이선이 작성해 세운 또 다른 묘표가 서 있습니다. 이 비석에는 아버지 이후원의 가계 기록과 두 차례에 걸친 이장 경위, 그리고 봉분 좌측에 첫째 부인 광주김씨가 함께 합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겨져 있습니다.

첫 질문의 답은 이 비석들에 남아 있었습니다. 병자호란과 북벌을 거치며 나라의 중책을 맡고, 훗날 조정을 이끌 거목들을 직접 발굴해 세운 정승이었기에 당대 최고의 학자와 재상들이 모여 그의 비석에 글과 글씨를 남겼던 것입니다.

지금

서울특별시 강남구 자곡동 대모산 동남쪽 자락,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묘역 건너편 언덕에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역에는 봉분 1기가 조성되어 있으며, 이후원과 초취 광주김씨, 재취 영월신씨 세 사람이 함께 묻힌 단분 형태입니다. 봉분 둘레를 둘러싼 돌인 호석 정중앙에는 정남향을 뜻하는 ‘오향(午向)’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오향(午向)은 조선시대 묘지 건축에서 향을 정확히 고정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장치입니다.

봉분 앞에는 해치상 2기와 기둥에 세호(細虎)가 돋을새김된 망주석 2기가 세워져 있습니다. 동남쪽 발치에는 송준길·송시열·이정영·김수항의 글씨가 적힌 묘표와 아들 이선이 세운 묘표가 300년 넘는 시간을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묘역은 2009년 12월 31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이후원 묘역의 비석에는 왜 여러 명의 이름이 적혀 있나요?
우의정 이후원이 1657년 송시열과 송준길을 발굴해 중용한 인연이 있어, 훗날 송준길과 송시열이 비문과 추기를 지었습니다. 글씨는 당대 명필 이정영이 썼고 두전은 영의정 김수항이 작성했습니다.
이후원의 무덤은 왜 여러 번 옮겨졌나요?
1660년 금천 삼석산에 처음 만들어졌으나 땅의 지세가 길하지 못하다는 풍수적 이유로 1685년 광주 세촌을 거쳐 1704년 현재의 강남 자곡동으로 옮겨졌습니다.
봉분에 새겨진 '오향'은 무슨 뜻인가요?
오향(午向)은 12지의 오(午) 방향, 즉 정남향을 뜻합니다. 묘를 조성할 때 방향을 정남쪽으로 잡았음을 봉분 호석에 직접 글자로 새겨둔 것입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문화재공간정보, 국가유산청 오픈API, 위키백과「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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