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에 다시 선 서원, 헐린 해는 1870년이다

용산서원 · 최진립, 1699년 건립과 숭렬사우 사액

경주 현곡의 서원이 다시 선 해는 1924년입니다. 주춧돌만 남기고 헐린 해는 1870년입니다.
용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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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형산강을 따라 경주시 현곡면 골짜기에 용산서원이 있습니다. 1924년의 재건을 이해하려면, 1699년에 누구를 모시려고 세웠는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1699년, 최진립을 모시다

숙종 25년(1699), 경주부윤 이형상이 지방 선비들과 함께 사당을 세웁니다. 모신 사람은 경주의 무신 정무공 최진립입니다. 태생지이자 뼈를 묻은 현곡면에 영령을 모셨습니다.

최진립은 선조 대에 태어나 인조 대까지, 조선을 흔든 큰 전쟁을 거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동생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도원수 권율 아래에서 울산 서생포 전투에 나섭니다. 그 공으로 선무원종 2등공신이 되고, 경원도호부사와 공조참판을 지냅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환갑을 넘긴 나이로 전선에 나갑니다. 용인 험천 전투에서 포위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순절합니다. 조정은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증합니다. 사사로운 재물을 탐하지 않아 청백리로 기록됩니다.

건립 12년 뒤인 숙종 37년(1711), 임금이 ‘숭렬사우’ 편액을 내립니다. 사액 뒤 서원으로 승격되어 지역의 교화와 학문 공간이 됩니다.

1759년의 글씨, 1870년의 철폐

영조 35년(1759), 성호 이익이 용산서원 기문을 짓습니다. 입구 편액 ‘용산서원’은 이익의 형 옥동 이서가 썼습니다. 이서는 조선 후기 명필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1870년(고종 7)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은 이 서원도 지나가지 않습니다. 사액을 받고 이익·이서의 글이 있던 서원은 주춧돌만 남긴 채 철거됩니다. 숭렬사우의 신주는 묻히거나 거두어지고, 글을 읽던 민고당은 허물어집니다.

1924년, 민고당과 숭렬사우

약 50년 뒤인 1924년, 경주의 선비와 후손이 1870년에 허물어진 터에 기둥과 기와를 다시 올립니다. 교육 공간 민고당과 제향 공간 숭렬사우가 다시 들어섭니다. 앞쪽에 교육 시설, 뒤쪽에 제향 공간을 두는 전학후묘 배치입니다. 전학후묘는 학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두는 서원 배치입니다.

1924년의 재건은, 삼란을 거쳐 용인 험천에서 죽은 최진립을 모시던 서원을 철폐 50여 년 만에 다시 세운 일입니다. 나라가 일본의 통치 아래 있던 해에, 1699년의 향사를 현곡 터 위에 되살렸습니다.

연도를 다시 두면, 1592년 의병, 1597년 서생포, 선무원종 2등공신, 1636년 험천 순절, 1699년 이형상의 건립, 1711년 숭렬사우 사액, 1759년 이익의 기문과 이서의 편액, 1870년 철폐, 1924년 재건입니다.

최진립은 선조 때 태어나 인조 때까지 세 번의 전쟁을 거칩니다. 1592년 동생 최계종과 의병을 일으키고, 1597년에는 도원수 권율 아래에서 울산 서생포 전투에 나섭니다. 그 공으로 선무원종 2등공신이 되고 경원도호부사, 공조참판을 지냅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환갑을 넘긴 나이로 용인 험천 전투에 나가, 포위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순절합니다. 조정은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증하고, 청백리로 기록합니다.

숙종 25년, 경주부윤 이형상이 지방 선비와 함께 그의 태생지이자 묻힌 현곡면에 사당을 세웁니다. 12년 뒤 숙종 37년, 임금이 숭렬사우 편액을 내립니다. 사액 뒤 서원으로 올라 지역의 교화와 학문 공간이 됩니다. 영조 35년에는 성호 이익이 기문을 짓고, 형 옥동 이서가 입구 편액 ‘용산서원’을 씁니다. 이서는 조선 후기 명필로 꼽힙니다.

1870년 고종 7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이 서원도 지나가지 않습니다. 사액과 이익·이서의 글이 있어도 주춧돌만 남습니다. 숭렬사우의 신주는 묻히거나 거두어지고, 민고당은 허물어집니다. 약 50년 뒤 1924년, 경주 유림과 후손이 그 터에 기둥과 기와를 다시 올립니다. 앞의 민고당, 뒤의 숭렬사우. 전학후묘 배치로 돌아왔습니다. 서남쪽에는 생애와 공적을 새긴 신도비각이 있습니다.

형산강 변 이 골짜기는 신라 왕릉의 그늘에만 있지 않습니다. 1699년의 향사, 1711년의 사액, 1759년의 기문과 글씨, 1870년의 철폐, 1924년의 재건이 한 서원에 있습니다.

지금

현곡의 용산서원에 들어가면 앞쪽에 민고당이 있고, 뒤편 계단 위에 최진립의 위패를 모신 숭렬사우가 있습니다. 서남쪽에는 생애와 공적을 새긴 신도비각이 있습니다. 1711년의 사액과 1759년의 편액 글씨가 있던 서원은 1870년에 철거되었다가 1924년에 다시 섰습니다. 50여 년 만에 민고당과 숭렬사우가 돌아온 이유는, 최진립을 모시던 1699년의 터를 유림과 후손이 다시 세웠기 때문입니다.

임진·정유·병자의 최진립, 서생포와 험천, 선무원종 2등공신과 청백리. 서원이 다시 선 해는 1924년이고, 헐린 해는 1870년입니다. 그 사이 50여 년을 주춧돌만 남아 있던 터가 민고당과 숭렬사우로 돌아왔습니다. 1699년 이형상이 현곡에 세운 사당이, 1711년 숭렬사우 사액과 1759년 이익·이서의 글을 거쳐, 서원철폐령 뒤에 다시 선 자리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용산서원은 언제 처음 세워졌나요?
조선 숙종 25년(1699년) 경주부윤 이형상이 지방 선비들과 함께 최진립을 기리기 위해 처음 건립하였습니다.
서원에 모셔진 최진립은 어떤 인물인가요?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모두 겪은 무신으로, 정유재란 때 울산 서생포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병자호란 때 용인 험천 전투에서 순절하였으며 청백리로 기록된 인물입니다.
용산서원의 글씨나 기문은 누가 썼나요?
영조 35년(1759년) 성호 이익이 기문을 지었고, 편액 글씨는 이익의 형이자 조선 후기 명필인 옥동 이서가 썼습니다.
서원이 철거되었다가 다시 세워진 경위는 어떻게 되나요?
고종 7년(1870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50여 년이 지난 1924년에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다시 건립되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오픈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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