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의 왕비 능 석물이 청계천 광통교 다릿돌이 된 까닭

서울 정릉 · 신덕황후, 1409년 이장과 1669년 복원

성북구 정릉의 석물 가운데 1396년 정동에서 옮겨 온 것은 장명등과 혼유석 아래 고석, 두 종류뿐입니다. 나머지는 1669년에 다시 새겼습니다. 옛 석물이 어디로 갔는지는 글의 끝에 있습니다.
서울 정릉_능침
서울 정릉_능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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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서울 정릉은 조선 1대 태조 이성계의 부인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황후 강씨의 능입니다. 신덕황후 강씨는 고려의 권문세가 강윤성의 딸이었습니다. 고려에는 향리에서 맞이한 부인과 수도에서 맞이한 부인을 따로 두는 풍습이 있었고, 강씨는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맞아들인 경처(京妻)였습니다. 1392년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강씨는 조선 최초의 왕비인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습니다.

그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신덕황후는 둘째 아들 방석(의안대군)을 왕세자로 책봉시켰습니다.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으로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방원(후의 태종)을 비롯한 왕자 계파가 있던 상황이었기에, 막내를 세자로 세운 이 결정은 왕실 안의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신덕황후는 아들의 세자 책봉 이후 오래 살지 못하고 139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조는 한양 도성 안,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에 능을 조성했습니다. 그것이 최초의 정릉입니다. 오늘 서울 정동이라는 지명은 이 정릉에서 나왔습니다. 태조는 도성 안에 능을 두고 왕비의 넋을 기리려 했습니다.

1398년, 신덕황후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왕세자 방석은 목숨을 잃었고, 신덕황후가 다져 둔 정치적 기반은 무너졌습니다. 뒤에 왕위에 오른 이가 3대 왕 태종 이방원입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도성 안에 둔 정릉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1409년(태종 9년), “도성 안에 능이 있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는 명분으로 정릉을 도성 밖, 지금의 성북구 골짜기로 이장하라고 명했습니다. 능을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신덕황후를 태조의 정식 왕비로 인정하지 않은 채 서인으로 격하했습니다.

정릉 (신덕왕후)
정릉 (신덕왕후)
출처: 위키백과「정릉 (신덕왕후)」

정동의 옛 정릉에 남아 있던 석물과 목재의 처분이 더 가혹했습니다. 태종은 옛 정릉을 헐어 나온 목재와 석물을 사신을 대접하는 태평관에 쓰게 했습니다. 정릉을 장식하던 병풍석과 석물은 청계천 광통교가 물에 쓸려 내려갔을 때, 그 다리를 복구하는 다릿돌로 쓰였습니다. 왕비의 능을 지키던 석물이 도성 사람들이 발로 밟고 지나던 다리의 받침돌이 되었습니다.

신덕황후는 왕비의 지위를 잃은 채 260년 동안 잊힌 존재로 남았습니다. 성북구 숲속의 능은 잡풀 속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반전은 17세기에 왔습니다. 1669년(현종 10년), 학자이자 신하인 송시열 등이 상소를 올렸습니다. 태조의 정식 왕비였던 신덕황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버려져 있던 정릉을 다시 왕릉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종은 그 상소를 받아들였습니다. 신덕황후의 신주가 종묘에 배향되었고, 성북구의 정릉은 정식 왕릉의 격식으로 다시 조성되었습니다.

다시 만든 정릉은 정동에 있던 태조 대의 규모와 다릅니다. 현종 대에는 추존된 왕비의 능제에 맞추어 정비했기 때문에, 왕릉을 두르는 병풍석과 난간석, 무석인을 생략했습니다. 그 대신 문석인과 석양, 석호를 새로 조각해 배치했습니다.

현재 정릉 능침의 석물 가운데 1396년 태조가 정동에 처음 능을 만들 때의 것은 두 종류뿐입니다.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입니다. 태종의 철거 속에서도 남아 성북구로 옮겨 온 이 장명등과 고석만 조선 초기 태조 대의 조각 양식을 담고, 나머지 석물은 1669년 현종 대에 다시 새겨 세운 것입니다.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광무 3년), 신덕황후는 신덕고황후로 다시 추존되어 왕실에서의 위상을 회복했습니다. 강윤성의 딸로 태조의 경처였던 강씨가 1392년 현비가 되고,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 1396년 정동의 능, 1398년 왕자의 난과 방석의 죽음, 1409년 성북구 이장과 서인 격하, 태평관과 광통교로 흩어진 석물, 1669년 송시열의 상소와 종묘 배향, 병풍석·난간석·무석인을 뺀 현종 대의 능제, 장명등과 고석만 남은 1396년의 조각. 정동의 왕비 능 석물이 청계천 다릿돌이 된 까닭은, 태종이 도성 안의 능을 헐며 그 석물을 광통교 복구에 쓰게 했기 때문입니다. 정동이라는 동네 이름도 그 첫 정릉에서 나왔습니다. 성북구에 남은 1396년의 조각은 장명등과 고석뿐이고, 병풍석을 포함한 나머지는 광통교와 태평관으로 흩어졌거나 1669년에 다시 깎였습니다. 도성 한복판 정동에 세워졌다가, 도성 밖 골짜기로 옮겨지고, 석물이 청계천 다릿돌로 쓰인 뒤, 260년 만에 복원되어 황후의 능이 되기까지, 정릉은 조선 왕조 권력의 부침이 남은 자리입니다.

지금

성북구 정릉동의 정릉에는 병풍석 없이 조성된 봉분과, 그 앞의 문석인, 석양, 석호가 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장명등과 혼유석 아래 고석입니다. 600여 년 전 태조 이성계가 정동 능터에 세웠던 석물이, 260년의 방치 뒤에 이 능에 남아 있습니다.

도심 청계천 광통교 쪽에 묻힌 옛 석물과, 성북구에 남은 장명등은 한 능에서 갈라진 조각입니다. 1409년 태종이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기며 정동의 목재와 석물을 태평관과 광통교 복구에 쓰게 했기 때문에, 지금 능에 1396년 석물로 남은 것은 장명등과 고석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정릉은 왜 본래 자리가 아닌 성북구에 있게 되었나요?
1396년 태조가 세상을 떠난 신덕황후를 위해 현 서울 중구 정동에 능을 조성했으나, 1409년(태종 9) 태종이 도성 안에 능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도성 밖 현재 위치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정릉의 옛 석물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태종이 능을 이장하면서 원래 정동 능터에 남아 있던 목재와 석물들을 태평관과 청계천 광통교 복구 자재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현 정릉에는 장명등과 혼유석 고석만 옛 석물로 남아 있습니다.
정릉이 다시 왕릉으로 복원된 것은 언제인가요?
1669년(현종 10) 송시열 등의 상소를 현종이 받아들여 신덕황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정릉을 왕릉으로 다시 조성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국가유산청 문화재공간정보, 위키백과「정릉 (신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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