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청계천 들머리의 광통교. 왕후의 능을 두르던 돌이, 왜 사람들이 밟는 다리 밑에 있을까요.
청계천은 북악산, 인왕산, 목멱산, 낙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인 물길입니다. 도성 한가운데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다 도성 밖 중랑천에 합칩니다. 길이는 11킬로미터입니다.
한양이 새 도읍이 되었을 때 이 물길은 손대기 전 상태였습니다. 비가 조금만 와도 집이 잠기고 길에 물이 찼습니다. 그래서 물길을 넓히고 둑을 쌓는 개천(開川) 공사가 크게 이루어졌습니다. 개천은 인공으로 다듬은 하천을 말합니다.
그 물 위에 다리가 놓였습니다. 모전교, 장통교, 수표교, 하랑교, 효경교, 마전교, 영도교. 도성이 끝나는 자리에는 수문인 오간수문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으뜸은 광통교(廣通橋)였습니다.
흙다리였던 남북 대로
광통교는 경복궁에서 육조거리를 지나 종루를 거쳐 숭례문으로 가는 남북 대로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왕이 사직이나 종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지나는 길목이기도 했습니다.
다리 주변에는 시전이 빽빽했습니다. 육의전을 비롯한 가게가 늘어서, 상인과 손님, 가마와 마차가 오갔습니다. 도성 안에서 통행이 가장 많은 다리였습니다.
조선 초 도성을 처음 지을 때 광통교는 돌다리가 아니었습니다. 흙과 나무를 섞어 굳힌 토교(土橋)였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건너는 다리가 흙이라, 장마와 큰비에 문제가 났습니다. 물살에 흙이 쓸려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진흙탕이 되어 가마와 말의 통행이 막혔습니다.
태종 10년, 1410년입니다. 도성 물길을 정비하던 태종 이방원은 광통교를 석교(石橋)로 다시 놓으라고 했습니다. 폭이 넓고 통행이 가장 많은 길이니, 오래 버티는 돌다리가 필요했습니다.
정릉의 병풍석이 교각이 되다
그 석교의 부재 가운데 정릉(貞陵)의 돌이 들어갔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에 있던 병풍석과 석물입니다. 병풍석은 능을 병풍처럼 두른 돌입니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가 조선을 세울 때 곁에 있었습니다.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에게, 신덕왕후는 정적이었습니다.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태조는 도성 안, 지금의 정동 부근에 정릉을 크게 조성했습니다. 태종은 그 능을 도성 밖 양주,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장하면서 능을 장식하던 병풍석과 남은 석물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1410년 광통교를 석교로 다시 쌓을 때, 그 돌이 받침돌과 교각 부재가 되었습니다.
병풍석에는 신장상(神將像)과 문양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신장상은 신장의 모습을 새긴 상입니다. 태종은 그 석물을 사람이 건너는 다리의 밑바닥과 교각에 넣게 했습니다. 신장상이 거꾸로 서거나, 발길 아래에 정릉의 돌이 묻힌 자리가 되었습니다.
도성에서 오가는 사람이 가장 많은 다리의 아랫부분에, 정릉 석재가 들어간 것입니다. 남북 대로의 번화가 밑에 승자와 패자의 돌이 끼어 든 해가 1410년입니다.
수위를 재던 다리, 다섯 칸 수문
광통교가 돌다리로 자리를 잡는 동안, 청계천의 다른 시설도 들어섰습니다.
1420년에는 수표교(手標橋)가 놓였습니다. 건너는 데만 쓰인 다리가 아닙니다. 기둥에 수위를 재는 수표를 세워, 청계천 물높이를 보았습니다. 여름에 물이 불으면 눈금으로 도성 안의 홍수를 살폈습니다.
도성 동쪽 끝, 물길이 밖으로 나가는 지점에는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습니다. 아치형 문이 다섯입니다. 수문 관리와 방어를 함께 맡았습니다.
청계천의 다리와 수문은 조선 도성 토목의 모음입니다. 도성 기능이 늘고 관리 체계가 잡히던 과정의 유구이기도 합니다.
광통교 밑의 정릉 석물은 물밑에 오래 있었습니다. 다리 위에서는 조선 후기까지 서화가들이 그림을 팔고 시전 장터가 열렸습니다. 밟고 지나는 다릿돌 아랫면의 내력은 잊혔습니다.
지금
근현대에 청계천은 복개되었습니다. 도시화와 교통량 증가로 물길을 콘크리트로 덮었고, 조선 시대 다리들은 기능을 잃거나 옮겨졌습니다.
1420년의 수표교는 복개 과정에서 원래 자리를 떠나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공원에 있는 수표교에서 당시의 석조를 볼 수 있습니다.
광통교도 아스팔트 아래 묻혔습니다. 2000년대 청계천 복원과 발굴에서 유구가 다시 나왔습니다. 1410년 재축조 때 다릿돌로 쓴 정릉 석물이, 조각이 남은 채 거의 완전한 형태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유적은 ‘서울 청계천 유적(광통교지, 수표교지와 오간수문지)’로 사적 제461호입니다. 종로 청계천 복원 구간의 광통교 주변, 물길 옆 유리 너머와 복원된 석재 사이에서 조선 초의 석물과 옛 다리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흙다리는 비에 무너졌습니다. 1410년의 돌다리는 그 자리에 정릉의 병풍석을 넣었습니다. 복원 발굴이 그 돌을 다시 꺼냈습니다. 다리 밑의 왕후 돌은, 능에서 온 부재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