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클럽

대한민국온전히 남음

[1904년] 고종 황제가 외국인과 조선인의 문화 교류와 친목을 위해 직접 헌장을 내려 만들었다. 고종은 덕수궁 안에 있던 자신의 2층 개인 서재를 클럽에 내주어 회원들이 모이고 식사하며 교유할 장소로 삼게 했다. 창립 회원 중에는 프리메이슨(Freemason)이 많았고, 그중 상당수가 금광업에 종사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에도, 광물 자원 개발에 광업 인맥이 필요했던 일제는 한동안 클럽 존속을 허용했다. 1930~40년대 활동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이 시기를 증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회원 W. 기퍼드 치즈먼(W. Gifford Cheeseman)이다. 1931년 함경도 일대에서 금광을 소유한 아버지를 따라 광부로 조선에 왔고 1932년 창립 회원으로 클럽에 가입했다. 일제강점기를 조선에서 겪은 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공군(RAF)에 참전했고, 종전 후 유엔 광업 고문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클럽은 미군에 접수돼 한동안 병영 겸 군인 클럽으로 쓰였다. 1955년, 당시 한국군이 관리하던 건물을 회원 6명이 비공식으로 되찾았는데 점유권을 두고 다툼이 일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 고문이던 해럴드 레이디(Harold Lady)가 왕실 문서고에서 고종이 이 터를 외국인들이 쓰도록 뜻을 남긴 기록을 확인해 위기를 넘겼다(이 문서는 훗날 다시 찾으려 했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건물 외관과 1층은 클럽이, 2층은 한양 프리메이슨 지부가 각각 보수했고, 해럴드 레이디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1970년 5월 클럽은 '사단법인'으로 정부에 등록해 이익을 필요한 단체에 배분하는 비영리법인이 됐다. 하지만 67년을 지켜온 이 보금자리는 곧 사라질 운명이었다. 1919년 고종이 석연치 않은 정황 속에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영친왕 이은은 11살에 '교육'을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가 이듬해 일본 왕족 마사코(이방자)와 혼인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왕실을 한국으로 초청하며 궁들이 왕실에 반환됐는데, 이은의 아들 이구가 클럽이 서 있던 땅을 팔기로 결정했다. 소유권 서류가 전쟁 통에 사라진 클럽으로선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1971년 클럽은 삼일빌딩(`samil-building`) 꼭대기 층으로 이전했다. 스포츠 활동에는 맞지 않는 자리라 기흥(수원 클럽)에 스쿼시·테니스장과 수영장을 따로 마련했지만 이용률이 낮아 재정난만 키웠다. 1980년에는 종근당빌딩으로 다시 옮겼다. 그래도 마땅한 보금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1985년, 일명 '실버하우스'로 불리던 건물에서 사교클럽 '사파리클럽'(보광개발이 1980년 외국인 전용 관광업소로 지었다가 개업하지 못한 자리를 임차해 있었다)이 있던 곳을 발견했다. 신라호텔과 타워호텔(`tower-hotel-teo`) 사이 남산 동쪽 기슭이었다. 국내외 은행들의 도움으로 이 부지를 사들여, 마침내 서울클럽은 자신의 집을 갖게 됐다.

큐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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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37.5531088 · 경도 127.0036811

출처: 서울클럽 공식 연혁(seoulclub.org), 나무위키「서울클럽」